
로스 맥도널드
사립탐정 루 아처가 등장하는 1961년 작 '위철리 여자' 입니다.
'움직이는 표적'에 이어 두 번째로 읽은 로스 맥도널드의 작품인데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정말 흥미롭게 읽히는 완성도 높은 작품입니다.
어렸을 때는 하드보일드를 의식적으로 피했었습니다. 홈즈나 반스, 포와로, 엘러리 퀸 등이 등장하는 작품들과는 너무나도 이질적이었기 때문이죠. 일단 첫 장부터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 암울한 묘사와 빈정대는 듯한 말투에 정나미가 떨어졌었습니다. 치밀한 계획에 의한 온갖 수수께끼로 점철된 호기심을 돋구는 살인사건이 아닌, 천하의 술꾼들이 난잡하게 헤집고 다니는 음침한 도시의 뒷 골목에서 벌어지는 피비린내나는 사건들은 어린 나이에 받아들이기 힘들었거든요. 담배는 어찌나 많이들 피워대는지... 그래서 해미트의 '피의 수확'이나 챈들러의 '안녕 내사랑아' 등의 작품들은 읽다가 결국 포기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시간이 흘러 제가 술꾼이 되기도 하고 골초가 되기도 한 현 시점에 이르러서는 일련의 하드보일드 작품들이 오히려 친근감있고 생생하게 다가옵니다. 이제는 챈들러의 말로나 맥도널드의 아처 같은 인물들이 매력적으로 보입니다. 물론 작품의 질은 장르를 불문하고 작품 자체의 완성도에 의해 달라지겠지만요. 최근에 읽은 해미트의 '피의 수확'은 섬뜩한 엔딩 부분이 주는 충격을 제외하고는 그다지 높은 점수를 줄 정도는 아니더군요.
지금까지의 느낌으로는 해미트의 작품은 상당히 무뚝뚝하고 지나칠 정도로 절제되어 있으며, 누구보다 비정하고 잔인합니다. 챈들러의 작품은 다소 현란하고 건들거리며, 상대적으로 여성스럽고 아름답습니다. 맥도널드는 진지하고 사려깊으며, 현실적이고 논리적입니다. 그저 지극히 주관적으로 짧게 표현한 저의 생각일 뿐입니다. 이 세명의 작가 중 저는 맥도널드가 가장 마음에 듭니다.
'위철리 여자'는 실종된 스무살의 휘베 위철리를 찾아달라는 의뢰로부터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하나의 실종사건에 얽혀드는 구구한 삶들이 남의 일같지 않게 느껴집니다. 한국이나 미국이나, 지금이나 500년 전이나 인간의 모습은 근본적으로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일깨워주더군요.
별 생각없이 읽어가다가 마지막 부분에서 의외의 결말에 흠칫 놀랐습니다. 다 읽고보니 여기저기 복선이 깔려 있음을 알겠더군요. 맥도널드가 심리학에도 관심이 많았다고 들었는데 이 작품에도 정신분석학적인 진단이 나옵니다. '환경이 빚어낸 과도한 죄의식' 이랄까요? 그러한 죄의식이 만들어낸 비극이라 할 수 있겠군요. 그러나 사건은 결코 간단하지 않으며, 결코 비약적이지도 않습니다. 단순히 실종 사건의 비밀을 해결한다기 보다는 나약하고 비겁한 인간 군상의 모습을 여실히 보여주는 완성도 높은 작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