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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으른 인간인지라, 블로그에 썼던 걸 그대로 올립니다아.





 이하는 픽션에 대한 픽션이다. 몇 가지 '정치적으로 불공정한' 부분이 있고, 그것에 대해서 누가 지적하려고 한다면 '그건 내가 아니라 가상의 독자일 뿐'이라고 변명을 할 준비가 충분히 되어 있다는 이야기다. 그럼, 산책을 시작해보자.



 레이먼드 챈들러의 소설을 읽을 때는 공원의 모습이 떠오른다. 정사각형으로 부지를 잡고, 정중앙을 지나는 직선 산책로를 그린다. 사립탐정 필립 말로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 산책로의 입구에 서 있다. 하지만 이 남자는 삐딱하다. 사람이 많으니까 어깨 좀 부딪칠 수도 있을텐데 그런 사소한 일에 눈썹을 찡그리며 머리를 두 번쯤 굴려야 알아먹을 수 있을 법한 냉소적인 농담을 불쑥 내뱉고는 길 밖으로 나가버린다. 꼴불견이다. 조금만 더 양보하고 온화한 태도로 다른 사람들을 대하면 안되나? 왜 구태여 일을 어렵게 만드는 건지, 갓 스무 해 살아온 나보다도 더 세상 원활하게 사는 법을 모르는 것처럼 보여 답답하다.

 내가 그렇게 뒤에서 그를 바라보며 투덜거리거나 말거나, 말로는 여전히 그 모양 그 꼴로 공원을 방랑한다. 한 10분쯤 가다 보면 이미 아파트 분리수거장 마냥 냄새 풍기며 우거진 수풀에 가려서 원래의 길은 보이질 않는다. 일단 주인공이니까 따라가고 보는 나이지만, 아무래도 불안하기 짝이 없어서 틈틈이 왔던 길을 돌아가, 지금까지 말로와 내가 어디어디를 통해 왔었는지를 확인하고 돌아오게 된다. 어쨌든 나는 안락의자에 앉아 있는 독자인지라, 도무지 중심 없이 돌아다니는 말로의 행보가 불안해 견딜 수가 없는 것이다. 이렇게 한정없이 돌아다니다가 해가 지고 공원 개방 시간이 끝나면 어쩔 셈인가? 터프한 척 하는 남정네와 밤을 지새우고 싶은 마음은 눈꼽만치도 없다. 저 작자, 뒤따르는 내가 이렇게 자상하게 돌아가는 길을 자꾸자꾸 확인해주고 있지 않았더라면 어쨌을런지. 그러나 입으로는 불만을 늘어놓거나 말거나, 어쨌든 일단은 따라가본다. 그가 수풀에 휘청이거나, 다음엔 어디로 갈지 머뭇거리며 주머니에서 위스키 병을 꺼내 홀짝이는 모습은 여전히 한심하다.

 말로의 시선이 닿는 곳은 더욱 가관이다. 이 작자는 애초에 정리되지 않은 지저분한 수풀, 장구벌레 헤엄치는 웅덩이, 〈슬리피 할로우〉에 나올 것 같은 고목 따위만을 따라가지만, 간혹 환경관리과 직원들 - 아니면 말고. 산책로를 거니는 행인1이 그런 세부적인 행정 업무에 대해 자세히 알게 뭔가 - 이 깔끔하게 단장해 둔 구역에 이르더라도 그 정제된 자연의 아름다움에 감탄하기보다는 발을 질질 끌고다니다가 쓰레기라도 하나 찾으면 파이프를 꺼내 물고는 침을 탁 뱉는다. 하기사 그 정도면 참을 수 있다. 하지만 쓰레기통을 사랑하는 도둑 고양이의 코라도 달린 걸까, 그가 거니는 곳에선 언제나 불쾌한 장면들이 발견된다. 젊은 남녀는 과도한 열정을 방패 삼아 오랄 섹스를 즐기는 중이고 늙은 갑부는 두터운 돈다발을 무기 삼아 자신보다 더 늙은 가난뱅이의 뺨을 후려 갈기는 중이다.

 그 광경을 보고 있는 것이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황급히 공중 화장실로 달려가 부끄러운 짓을 하고 주저주저하며 다시 그를 따라가 보자면 더욱 가관. 십중팔구 정액을 삼키기 직전의 여자는 남자의 목덜미에 칼을 꽂을 참이고, 그 남자는 늙은 가난뱅이를 돕는 척하며 갑부의 돈다발에 손을 가져가고 있으며, 가난뱅이의 뒤에는 갑부가 고용한 덩치가 공업용 망치를 들고 서 있기 마련이다. 더 이상 부끄러운 짓을 할 기운도 없어진 나는 그저 바라만 보고 있는 게 고작인데, 말로는 어슬렁거리다가 그제야 등장한다. 그러더니 가난뱅이 대신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고, 남자 대신 여자의 칼에 찔려주는가 하면 이번에는 갑부에게 고용되어 돈다발 앞에 서 있다가 남자에게 걷어채인다. 결과적으로 말해서 가난뱅이는 코 앞까지 뇌수로 뒤범벅이 되어 죽고, 남자는 경동맥에서 피분수를 만들며 죽고, 여자는 남자가 갑부에게서 훔친 돈을 가져가다 덩치에게 두들겨 맞는다. 이쯤되면 상상할 수 있는 최선의 상황이라고 해봐야 덩치가 여자의 오발탄에 맞아 폐가 으깨지고, 여자는 엉망진창이 되어 사라지고, 말로는 돈다발을 주워 피를 툭툭 턴 뒤 거기서 일당을 뺀 나머지를 갑부에게 던져주는 정도다.

 그쯤 되니 그래도 어찌어찌 어느새 공원 횡단은 끝났고 다행히 저 멀리 개똥 묻은 벤치 너머로 산책로가 보인다. 말로는 찌그러진 모자를 펴며 유유히 그 산책로 출구로 나가 사라지고, 나는 개똥 냄새에 코를 찡그리며 마찬가지로 공원을 나선다. 기분전환을 위해 준비한 상쾌한 산책은 그야말로 개판이 돼서, 그날 오후에 하기로 마음 먹고 있었던 스티븐 스필버그의 〈E.T〉 관련 블로깅은 집어 치우기로 한다. 대신 공원 산책을 나서기 전에 꼼꼼하게 사뒀던 (그리고 아무짝에도 쓸모 없었던) 공원 지도를 펴서 내가 오늘 하루 어떤 길로 공원을 돌아다녔는지 체크를 해본다. 아니나 다를까, 통상 산책로의 대여섯배쯤 더 걸었다. 쓸데없이 땀만 빼고, 옷은 세탁소에 맡기지 않으면 안될 정도로 지저분하다.

 며칠 후에 친구들과 만났다. 역시나 공원 산책로 이야기가 나온다. 아무래도 웰빙에 미쳐서 베리나이스 요거트라는 괴상한 이름의 음식까지 나오는 시대이다보니 규칙적으로 산책하기 좋은 자연친화적 장소에 대한 관심이 드높아지고 있다고나 할까. 말을 들어보니 정규 산책로의 시설은 대단히 훌륭하고 활용도도 뛰어나서, 중간중간 유명 화가들의 벽화며 조각들이 전시되어 있기도 하고 뛰어난 아름다움을 선보이는 분수대도 있는가하면 수는 좀 부족하지만 최신의 운동 설비까지 갖추고 있는 모양이다. 그뿐인가, 수시로 대기하고 있는 환경미화원들 덕분에 그토록 많은 이용자 수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청결한 모습이라고 한다.

 그 말을 듣고 있자니, 문득 위스키와 말보로가 그리워지는 것이었다.



 덧 하나. 『안녕 내 사랑』은 기존에 읽었던 두 작품보다 훨씬 더 마음에 들었다. 그런데 이리저리 돌아보면 『빅슬립』이나 『하이윈도』가 더 좋았다는 의견도 있다. 개인차이기도 할테고, 어느 작품을 마지막에 읽었는가 하는 문제이기도 할 듯 하다. 앞의 두 작품과는 달리 단숨에 읽어치웠는데, 이것이 단지 이 작품이 셋 중 가장 잘 쓰여진 작품이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 동안 레이먼드 챈들러의 글쓰기에 많이 익숙해졌기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다.


 덧 둘. 물론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기 때문이었기도 하겠지만, 갈수록 맛깔스러워지는 장경현 님의 해설 또한 일품이다. 김상훈 님의 SF 소설 해설처럼 한 작품에만 주목하지 않고 범위를 넓혀가며 장르의 경향과 다채로운 작품들을 소개해주니 무지한 독자로서는 고맙기만 하다. 한 가지 의문사항이 있다면 하드보일드 탐정의 이미지를 이야기하면서 영화 〈라스트맨 스탠딩〉이 대실 해미트의 『붉은 수확』을 차용한 작품이라고 하셨는데, 이 영화가 내가 알고 있는 그 영화, 그러니까 웨스턴 장르에 별 관심이 없는 내가 무척 사랑하는 브루스 윌리스 주연의 하드보일드 갱스터 웨스턴 영화라면, 그 작품은 대실 해미트보다는 구로사와 기요시의 〈요짐보〉의 연장선상에서 읽혀야 하는 작품으로 알고 있다. 〈라스트맨 스탠딩〉과 〈요짐보〉 사이의 연결 고리에는 한 줌 의심의 여지가 없으니까. 나는 아직 대실 해미트의 작품을 읽지 못했는데, 혹시 『붉은 수확(『피의 수확』으로 나오기도 했다)』과 〈요짐보〉 혹은 〈라스트맨 스탠딩〉의 관계를 아시는 분께서는 가르쳐주셨으면 감사하겠다.
  • sabbath 2004.08.24 05:35
    그러고보니 예전에 장경현 님께서 작성하셨던 추리 소설 추천 목록에서도 이미 『붉은 수확』과 〈라스트맨 스탠딩〉의 관계가 언급이 됐었군요.
  • 장경현 2004.08.24 20:09
    장황한 해설을 좋게 봐주시니 정말 고맙습니다.
  • 장경현 2004.08.24 20:10
    그리고, 제가 알기로는 <요짐보>도 원래 <피의 수확>을 바탕으로 삼았다고 하더군요. <피의 수확>은 해미트가 영화 판권을 팔지 않아서 그대로 영화화할 수 없어 그런 식으로 비공식
  • 장경현 2004.08.24 20:11
    적인 일종의 오마주 영화로들 만들었다고 합니다. <라스트맨 스탠딩>은 표면적으로는 <요짐보>를 바탕으로 했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피의 수확>에 근본을 두고 있다고 합니다.
  • sabbath 2004.08.25 01:51
    아아, 그렇군요. 다른 분께서도 『피의 수확』과의 접점이 훨씬 짙어보인다고 하시더라고요. 빨리 정식으로 소개됐으면 좋겠는데(DMB는 도무지 손이 안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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