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크리스티아나 브랜드
수백명의 관객이 지켜보는 야외극 무대의 탑위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던 여배우가 갑자기 바닥으로 떨어집니다. 순간 관객은 술렁이고 연극을 지켜보던 콕크릴 경감은 무대위로 뛰어 올라갑니다. 여배우는 죽어 있었고 사인은 교살.... 무대 위에는 투구 쓴 갑옷차림의 말 탄 기사 11명과 살해된 여배우 이세벨(제제벨) 뿐... 무대 앞에는 수많은 관객들이 지켜보고 있었으며 무대 뒤의 대기실로 통하는 문은 무대 쪽에서 잠겨져 있었습니다.
수백명 앞에서 벌어진 공개 살인사건이라는 설정은 상당히 흥미로왔습니다. 띠지에 쓰여 있듯이 황금시대의 본격 추리소설이 맞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지요. 그러나 뒤로 갈수록 책장 넘어가는 속도가 떨어지면서 끝까지 읽어내는데 많은 인내심을 요구하더군요. 물론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결말부와 트릭은 높이 평가할만하지만 극적인 느낌은 떨어졌습니다.
등장인물들에 대한 느낌을 거의 살리지 못하는 인물묘사와 별 설명도 없이 휙휙 전환되는 장면들, 드라마적인 요소 보다는 수수께끼 풀이를 위한 단순한 사실의 나열들이 지루한 독서의 원인이었습니다. 게다가 번역은 지금까지 읽어본 동서문고 중 제일 별로였구요. 쉽게 접하지 못하는 작품들을 번역 출간해준 동서출판사에게는 항상 고맙게 생각하고 있지만 전혀 손을 보지않았음이 의심되는 몇몇 작품들은 정말 유감입니다.
이 작품은 전형적인 수수께끼 풀이식 소설인데요 콕크릴 경감을 비롯한 등장인물들은 살인 방법을 놓고 갖가지 가능성들에 대해 열렬한 토론을 벌입니다. 토론이라고 해서 독 초콜릿 사건 처럼 등장인물들이 차례로 등장해서 형식과 격식을 갖추고 벌이는 토론이 아닌 용의자들이 자신의 혐의를 벗기 위한 변명에 가까운 토론입니다.
제가 의심하고 있던 가능성들에 대해 등장인물들이 이것저것 지적해대며 알아서 궁금증을 풀어주더군요. 토론이 이어지면서 가능성들은 하나씩 폐기됩니다. 또다른 인물이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면 다른 인물이 그 가능성의 불합리함을 지적합니다.
이 작품의 묘미라면 바로 이 토론에서 다루어지는 가능성들이 상당히 설득력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 용의자들이 모두 그럴듯한 살인동기와 기회를 가지고 있었고, 작가는 용의자 각각이 모두 독립된 범인이라고 해도 수긍이 갈 수 있는 묘한 상황을 만들어 놓고 있습니다.
계속되는 가능성 제시와 불합리성 제기를 읽는 재미는 쏠쏠한데요 좀 더 단계적인 서스펜스를 살렸다면 또한 인물들의 개성이 독특하게 부각됬다면 상당한 걸작이 될 수 있었을 거라는 아쉬움이 들었습니다.
이 작품의 트릭은 칭찬하지 않을 수 없군요. 알고보면 상당히 단순한 트릭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요, 개인적으로 오히려 단순한 트릭이 주는 충격 효과가 더 크다고 생각합니다. 쓸데없이 복잡한 상황과 트릭은 개연성 문제는 둘째치고라도 왠지 작가에게 이해를 강요당하는 느낌이 들거든요. 이 작품의 트릭은 군더더기 없이 깔끔합니다.
책의 작품해설은 열페이지가 넘는 분량으로 작가 크리스티아나 브랜드의 작품에 대해서 자세한 설명을 해주고 있습니다. 몇몇 작품들은 줄거리까지 언급하면서 그녀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고 있는 걸 보면 글을 쓰신 분은 아마도 크리스티아나의 팬인 듯 싶습니다. 인터넷에서 검색해보니 역시나 일본에는 그녀의 작품이 상당수 번역되어 있더군요. 칭찬이 자자한 '초록은 위험해(Green for danger)'가 상당히 끌리긴 하지만 언제 번역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