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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생 시절, 청소년용으로 번역된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을 읽었던 적이 있습니다. 당시 사춘기였던 저는 소설 속 그루센카라는 여인에 대한 평판들에 완전히 매혹되었지요. 저는 저를 무릎 꿇릴 팜므 파탈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웬걸, 소설의 뒤에 가보니 그루센카는 가련하고 순정한 여인에 더 가까웠습니다. 인간에 대한 깊은 탐구로 유명한 도스토옙스키가 캐릭터를 그저 평면화된 이미지에 가둘 리가 없었지요.

 

요코미조 세이시의 <옥문도>에도 비슷한 캐릭터가 나옵니다. 기헤에의 부인이자 기토 분가의 안주인, 시오를 소설에서 어떻게 묘사하는지 옮겨 보겠습니다.

 

이 여자는 고양이처럼 발소리도 내지 않고 걷는 법을 터득하고 있음이 틀림없다. 시오 씨는 아름답다. 얼굴이 아름다울 뿐 아니라 자태의 아름다움도 비길 데가 없다. 몸의 선이 뭐라 말할 수 없을 만큼 나긋나긋하고 부드럽게 부풀어 있다. 처음 센코사에서 만났을 때도 코스케는 놀라움에 눈을 크게 떴지만, 지금 이렇게 어슴푸레한 고풍스런 현관 칸막이 저편에 얌전히 서 있는 걸 보자 새삼스레 신비롭게 가슴이 떨렸다

 

여기서 긴다이치 코스케가 시오에게 마음을 뺏겨 있으며, 그 정도로 시오가 위험한 매력을 지닌 여자라는 사실을 느끼지 못할 사람은 없을 겁니다. 그런데 유키에의 죽음 앞에서 시오는 누구보다도 빨리 무너져내립니다. 심지어 이후엔 제대로 된 등장조차 없지요.

 

이 기묘한 역설(?)은 사실 <옥문도> 전체를 가로지르는 트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옥문도>에는 두 가지 층위의 수수께끼, 뒤집어 말하면 두 가지 층위의 진실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사건의 방식 및 범인에 관한 것, 즉 세 남자가 어떤 방식으로 세 자매를 죽이고 수사망에서 벗어날 수 있었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이 전체적인 사건을 추동하는 기이한 에너지가 과연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독자가 이 두 번째 수수께끼에 대해 어렴풋이 감을 잡게 되는 건 코스케가 진실을 밝히기 직전 장면, 즉 기헤에와 코스케의 문답을 들으면서입니다. 여기서 독자는 기헤에에 대해 갖고 있던 기존의 인상, 즉 카에몬에게 전혀 대적하지 못하며 아내에게 휘둘리는 별 볼일 없는 권력자의 이미지가 완전히 그릇된 것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기헤에는 오히려 지적이면서도 강인하고 여유로운 인물이었지요.

 

기토 분가에 대한 인식의 전환, 이는 결과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그 모든 일들을 반대로 읽게 만듭니다. 주재소의 시미즈가 처음 코스케를 범인으로 추정하며 세웠던 논리는 코스케가 히토시가 보낸 자객일 것이라는 추측에 기반한 것이었습니다. 코스케는 이것이 사실이 아님을 알고 있지만, 거기에 일말의 진실이 깃들어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그리하여 코스케가 세운 추리는, 히토시가 직접 섬에 숨어들어 살인을 저지른다는 것이었지요. 이 추리들은 공통적으로, 세 자매 살인사건의 본질을 두 기토 가의 알력으로 보고 있습니다. 따라서 가장 유력한 용의자는 기토 분가 쪽의 사람들, 즉 우카이나 시오, 혹은 히토시가 되며 외부에서 온 코스케조차 선상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진실은 정반대였습니다. 말하자면 이 사건은 섬의 질서를 해체하려는, 혹은 권력을 교체하려는 의지로 인해 발생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들을 유지하려는 의지로 인해 발생한 것이었습니다.

 

독자들이 사건의 진실을 쉽사리 추측할 수 없는 것은 일차적으로는 앞서 말한 듯 독자가 사건의 본질을 알력으로 보도록 작가가 은근히 유도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결정적인 이유는 이것이 말 그대로 너무나 무섭기때문입니다. 형제, 혹은 사촌 간에 권력 투쟁을 위해 서로를 죽이는 것은 그렇게 무섭게 느껴지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할아버지가 도움 되지 않는 손녀들을 죽이고자 거대한 퍼즐을 기획하는 모습은 모골이 송연할 정도로 섬뜩합니다.

 

이 공포는 도대체 어디서 유래하는 것일까. 그것은 무엇보다도 인간의 도덕적 규범을 인간의 관습이 먹어치우는 지옥도를 암시하기 때문이며, 또한 아무리 발버둥쳐도 벗어날 수 없는 시간의 고리를 형성하기 때문입니다. 아닌 게 아니라, <옥문도>의 공포는 미지의 것에 대한 두려움을 강조하는 호러 장르의 정서와는 전혀 다릅니다. <옥문도> 전체를 지배하는 정서는 밤의 것이 아니라 안개의 것입니다. 범인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완전히 베일에 싸였다기보다는 잡힐 듯 잡히지 않는-그럼에도 끊임없이 조종당하는 것 같은 그런 기분 나쁜 감정이 <옥문도>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질서는 미스터리를 통해 유지됩니다. 작고하신 추리소설 블로거 물만두홍윤 님은 <옥문도>를 읽으며 탐정이 얼마나 허무한 직업인가를 새삼 느꼈다고 고백한 적 있습니다. 일단 사건이 일어나야만 탐정은 비로소 어떤 일을 할 수 있으며, 일어나지도 않은 사건을 방지할 수는 없기에 허무하고도 씁쓸한 직업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치마타의 유언을 통해 이 불가능성을 독자들에게 또렷이 암시했음에도(설마 세 자매 중 한 명이라도 살아남을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없겠지요) 요코미조가 코스케를 옥문도에 보낸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지 않을까요. (코스케)는 진실을 파헤치러 옥문도로 갔고, 질서를 깨뜨리러 옥문도로 갔습니다. 이 흉악한 닫힌 체계가 계속해서 유지되어서는 안 되기에, 그리고 체계를 무너뜨릴 가장 효과적인 도구는 진실이기에.

 

카프카의 명언 중에 책은 얼어붙은 마음을 깨는 도끼가 되어야 한다라는 말이 있지요. 요코미조는 탐정이 얼어붙은 질서를 깨는 도끼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유키에가 범종에 갇힌 채 시체로 발견되었을 때, 코스케는 료넨 스님의 발언을 반추하며 살인 사건의 가볍고 무거움에 대해 생각합니다. 이 때 코스케의 생각이 단지 소설 내적인 것은 아닙니다. 이 순간 요코미조는 코스케의 생각을 빌려 본격 추리소설의 근본적인 맹점(죽음이라는 거대한 사건을 수수께끼로 치환하는 것)에 대해 성찰합니다. 그러나 그가 이 세 자매 살인 사건의 의미 자체에 대해서 계속해서 고민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의 결론은 진실이 결국 사회를 올바른 길로 이끌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어쩌면 당신 일본 국민들의 염원이었을수도 있지요. 개방되지 않은 인습 속에서 도덕을 말살하는 이 섬뜩한 체계들을 향해 근대가 진실의 방아쇠를 당겨주는 것-그것이 그들과 요코미조가 진정 원했던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문제는 남습니다. 무너진 체계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코스케는 손을 모으고 부처님을 향해 합장합니다.

 
  • 송현제 2024.11.21 21:18
    옥문도 참 재미있는 소설인데 저한테는 안 좋은 기억이 있는 소설이죠. 도서관에서 빌려봤는데 어떤 분이 친절하게 연필로 이 분이 범인이라고 적어 놓으시고 트릭까지 책에 적어 놓아서 기분 잡쳤던 기억이 ::
  • 뽁실 2024.11.22 02:32
    멋진 글솜씨에 감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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