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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또래의 비슷한 소년들처럼 팬더추리문고의 홈스와 뤼팽, 해문추리문고의 애거서 크리스티 등에 매료되었다가 고교시절에는 입시 때문에, 대학시절에는 음주가무에 바빠 추리소설을 전혀 읽지 않았다. 대학을 졸업하고도 시절이 하수상해서 1년간 백수생활을 할 때 주머니는 텅 비어 있는데 시간은 흘러넘칠 정도로 많다 보니, 돈 안 쓰고 시간을 때울 수 있는 곳을 찾아다니다 도서관에 안착하게 되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밥값만 들고 가면 아침 9시부터 밤 10시까지 버틸 수 있는 곳이 대한민국 천지에 어디가 또 있겠는가. 아무튼  머리도 복잡하고 우울한 형편에 이른바 양서(?) 류보다는 오락거리에 손이 갈 수밖에 없는데, 활자로 된 궁극의 오락 하면 역시 추리소설일 터. 어렸을 때 크리스티에 버금간다고 들은 앨러리 퀸의 시그마북스 20권을 전부 독파할 때까지는 하루하루가 즐거웠지만 진짜 문제는 다음부터였다. 2004년 당시는 정말이지 국내 출간된 추리소설 자체를 찾아보기 힘들었던 것이다. 도서관에서 구할 수 있는 추리소설을 거의 다 찾아보고 나서도 갈증이 풀리지 않아 추리소설 동호회에 참석해서 예전에 나왔다가 절판된 책 정보도 듣고, 동인천이나 신촌의 헌책방에서 매일같이 발품도 팔고...



요즘처럼 추리소설이 범람하다 못해 발에 채이는 시대에 사는 신세대 추리소설 애호가들은 절대 이 당시의 추리소설 가뭄을 이해할 수 없으리라. 여러분들은 행복한 줄 알아야 돼! 암, 그렇고말고, 쿨럭(전형적인 꼰대 말투). 특히 번역 추리소설은 한 2006~2007년경 일본 쪽을 시작으로 영미권으로 확대되어 매년 출간량이 상승 일로를 치닫다가 2015년 현재는 눈에 띄는 하강세를 보이는 듯하다. 그러나 대략 10년에 육박하는 번역 추리소설의 출간 러시(대충 1년에 100여 권 이상은 쏟아졌으니) 덕분에 이제는 다시 백수가 되도 더 이상 읽을 추리소설이 없다는 말은 못할 것 같다. 다만 양지가 있으면 음지가 있는 게 세상사의 법칙인지라 대대적인 추리소설의 홍수 속에서 작품성이나 재미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독자들의 눈에 띄지 못하고 사장된 책들도 부지기수이다. 노쇠한 추리소설 애호가로서, 그리고 추리소설 대출간 시대에 미약하나마 참여를 했던 편집자로서 흙 속의 진주에도 좀 관심을 가져주십사 하는 마음으로 그런 책들을 한 편씩 소개해올리려 한다. 내 생각에 판매가 거의 이뤄지지 않은, 서평도 10개 미만만 올라와 있는 추리소설들로 한정해서 매주 한 권씩 10권 정도만 우선...뭐 나중에 내키면 2차분도 할 수도 있겠지.



어째 사설이 본문보다 더 길어진다^^;; 영광스런 재발굴 프로젝트의 제1편은 2007년에 발간된 시미즈 다쓰오의 <스쳐 지나간 거리>이다. 출판사는 요즘은 추리소설과 절연(?)한 듯 보이는 중앙북스. 번역자에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80년대부터 2000년대 말 작고하시기 전까지 우수한 해외 추리소설 소개에 온 정열을 바치신 정태원 선생님이다. 보통 정태원 선생님이 고르셨던 작품이면 요즘 말로 믿고 볼 만하다는 게 개인적인 생각. 일본에서는 1992년에 출간되었으며 (지금은 없어진) 일본모험소설협회상을 수상했다. 여든이 넘은 노작가 시미즈 다쓰오는 <스쳐 지나간 거리>만 봐도 플롯과 문체 등에서 대단한 필력의 소유자임이 증명되는데, 다른 작품을 국내에서 만나볼 수 없어 아쉬울 따름이다.



지방 학원에서 근무하는 마흔 줄의 강사 하타노가 작년께 도쿄로 올라가고 나서 연락이 두절된 여제자를 찾아 상경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헌데 이제 막 스무 살이 된 여제자는 가정 형편이 그다지 유복하지도 않은데 고급 빌라에 살고 있었고, 외제 차까지 뽑아놓은 상태였다. 이쯤되면 누구나 불온한 거래를 의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 암담한 심정으로 여제자가 사라진 빌라에서 나온 하타노 앞에 역시나 그녀를 찾아다니는 정체불명의 괴한들이 나타나고, 설상가상으로 추적 도중에 과거에 하타노와 악연이 있던 남자들과도 다시 조우하게 된다. 원래 하타노는 도쿄에서 거대 법인이 운영하는 여자 고등학교의 정식 교사였지만 자신이 가르쳤던 여학생과의 결혼이 스캔들로 비화되어 파면 및 이혼으로 인생이 나락으로 떨어졌던 것이다. 위에서 말한 악연남들은 다름 아닌 하타노 몰아내기 프로젝트에 가장 적극적으로 가담한 놈들이고. 하타노는 여제자를 찾아 도쿄를 누비는 한편으로 온갖 문제들을 회피로 일관했던 자신의 비겁한 과거와도 대면하게 되는데...    



대충 이런 줄거리이다. 주인공이 비열한 거리에서 벌어지는 비열한 범죄에 행동으로 맞서는 전형적인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이라고 보면 틀림이 없을 것이다. 재미있는 건 여타의 하드보일드와 달리 <스쳐 지나간 거리>에서는 하타노가 탐정이나 경찰이 아닌 국어를 가르치는 진짜 평범한 중년남인데, 그의 추리력이나 행동력, 완력, 용기 등은 거의 필립 말로, 샘 스페이드를 방불케 한다는 점이다. 심지어 납치되어 죽음의 위기를 두어 번 겪고, 여제자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 정확하게 추리하는 틈틈이 전 아내와의 로맨스까지 펼치는 데, 이 모든 걸 단 사나흘에 해내니 놀랍다는 말밖에 안 나온다. 왜 우리나라도 대학이나 중고교의 학원재단 비리 등의 문제가 왕왕 뉴스에 보도되어 지탄을 사곤 하지 않는가. 이 작품도 딱 그런 쪽의 음모가 배경에 깔려 있어 관련 소재에 흥미가 있는 분이라면 더욱 재미있을 것이다.



어차피 악역은 처음부터 제시되고, 감춰진 흑막도 초반에 유추할 수 있어 추리나 트릭이 중요한 작품은 아니다. 하드보일드 하면 어디까지나 스타일이 최우선 아니겠는가. <스쳐 지나간 거리>에서도 인간의 온기를 조금도 느낄 수 없는 빌딩 숲 속에서의 냉소와 우수, 허무와 비애의 정서가 깊게 깔린 주인공의 독백이 가슴을 친다. 어쩌면 제목 자체도 하타노가 12년만에 돌아왔다가 고향으로 돌아가는 동안 스치듯 지켜본 도쿄의, 과거부터 지금까지 언제나 똑같은 겨울처럼 차디찬 거리를 말하는 게 아닌가 싶다. 한마디로 물질만능주의와 배금주의 등이 판치는 도시에 대한 환멸이 깊게 배어 있어 젊은 사람들보다는 중년층이 더 깊이 공감할 내용이다. 또한 어리석었던 지난날의 자신과 대면하여 고통을 받는가 하면, 이제라도 다시 제대로 살고 싶어 분투하는 중년 남자의 이야기이다 보니 영락없는 '중년 하드보일드'랄까.


  

줄거리에서 제일 중요한 부분은 사라진 여제자를 찾는 것이겠지만 그 못지않게, 아니면 더 중요한 부분은 하타노가 과거에는 용기가 없어 끝내 놓치고 말았던 전 아내와의 재회일 것이다. 작가도 이 소설의 성패를 가늠하는 결정적인 장면이 이곳이라는 걸 감지했는지 심리묘사나 대화에 상당히 공을 들였는데, 덕분에 모처럼 소설 속의 인물이 아닌 진짜 살아 숨 쉬는 듯 생생한 남녀의 대화를 들은 기분이었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하타노는 과거 아내가 학생 때 한눈에 반해 어떻게든 그녀를 얻기 위해 선생으로서의 신뢰감을 이용해 접근하는 방식을 취했으며 자신은 선택권도 없고 대등하지 않은 관계의 여자를 유혹한 데 불과한 나쁜놈이었다고 고백한다. 그러자 전 아내는 자신은 10대 여자에 불과했지만 진지했고, 한 사람의 독립적인 인격체로서 남편을 선택한 것뿐이라고 응수한다. 이 장면에서 머리를 세게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남자들은 보통 자기만의 일방적인 자의식 속에서 상대방 여성을 재단할 뿐, 그 여성이 독립적인 인격체로서 어떤 사고를 하는지는 크게 관심을 두지 않는 경우가 많지 않은가. 옛날의 하타노 같으면 죽었다 깨나도 이해하지 못할 어떤 지점을 12년의 세월이 도달하게 해주었다고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단 사나흘 동안의 시간적 한계 때문인지 하타노가 만나는 모든 인물들이 사건과 관계가 있는 등 우연의 요소가 짙고 플롯이 조금 단순한 것 단점이겠지만, 하드보일드의 스타일과 맛을 충실히 살렸고 심리 묘사에도 깊이가 있어 어떤 기준으로도 훌륭한 소설이다. 보는 이에 따라선 역대급 걸작도 될 수 있는데, 특히 살아온 날이 많아 그만큼 후회도 많이 남은 중년층에겐 가슴을 칠 만한 대목이 여러 군데 있을 것이다. 재미난 추리소설을 찾아 방방곡곡을 헤매던 20대 중반의 나 또한, 어느새 마흔이 가까워진 중년이 되었기에 더욱 깊이 공감하며 몰입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정태원 선생님을 추억하며 이 부족한 글을 맺어야겠다. 선생님은 추리소설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나이나 신분(?) 등을 초월하여 누구나 만나 작품에 대한 얘기를 나누는 걸 좋아하셨다. 내게 이 책을 선물해주실 때도 장어집에서 비싼 장어를 사주셨는데 당신께서는 단 한 점도 드시지 않고 내가 먹는 걸 흐뭇하게 지켜보실 따름이었다. 나중에 알았는데 이때는 이미 후두암이 깊이 진행되어 음식물 섭취도 힘드셨다고 한다. 물도 힘들게 삼키실 정도였으니 무슨 말을 더 하겠는가. 다만 이따금 추리소설 얘기를 하실 때는 말이 무척 빨라지고 어린아이처럼 손짓발짓을 섞어가며 흥분하셨다. 분명히 그 좋아하는 추리소설 얘기를 하실 때는 어떤 통증도 느끼지 못하시는 것 같았다. 잘은 모르지만 분명히 그러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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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니루 2015.11.03 21:49
    정성스런 소개 감사합니다. 정태원 선생님과의 일화도 애틋하네요.
  • 나혁진 2015.11.03 22:58
    모처럼 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제 생각에 읽어볼 가치가 있지만 아깝게 묻힌 추리소설을 한 권이라도 더 팔아드리기 위해 시작한 프로젝트인데, 찾아보니 <스쳐 지나간 거리>는 절판이네요-_-;;
  • 비니루 2015.11.04 00:56
    가까운 도서관에도 없길래 그 이야길 쓸까 말까 하다가 언제든 어떻게든 구할 수 있겠지 싶어 말았어요. ^^;;
  • 나혁진 2015.11.04 08:52
    다음에는 확인해보고 되도록이면 절판 안 된 책으로 올릴게요^^
  • 송현제 2015.11.04 03:30
    이 책 기대하지 않고 읽었는데 나를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이런 기홱 매우 좋네요
  • 나혁진 2015.11.04 08:53
    생각보다 많이 관심 가져주셔서 고맙습니다. 책임감을 느끼고 어떻게든 10편은 채워보겠습니다^^;;
  • KenSmith 2015.11.05 01:32
    재미있는 책 같습니다. 절판이라고 하니 도서관에 갈 때 찾아봐야겠네요.^^
  • 나혁진 2015.11.06 06:03
    도서관에서라도 꼭 찾아서 읽어보세요. 놓치기 아쉬운 하드보일드 소설입니다!
  • maettugi 2015.11.05 19:32
    재미있는 기획 리뷰네요. 잘 읽었습니다. 잘 짜여진 스릴러물이죠.
  • 나혁진 2015.11.06 06:04
    맞습니다. 너무 꽉 짜여져서 살짝 작위적이고 부자연스러운 느낌도 들긴 하는데, 그래도 장점이 훨씬 많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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