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건 아주 옛날~ 그러니까 한 4년 전이네요. 당시 앙끄(anc)를 들락날락 거리면서 논쟁을 즐기고는 했습니다. 문득 오늘 새책 소식에 지뢰진을 잠깐 언급하면서 이 글이 떠올랐습니다. 덕분에 여기 게시까지;;
생각하면 참 개인적인 게시판이로군요..
그나저나 글이 참 귀엽군요. 나도 이런 글을 푸훗 >.<;;
'지뢰진'- 살아야 하는 이야기
아래 adreamer님이 쓰신 "지뢰진-16권으로 끝내라"란 글을 읽고 느낀 바 크다. 만나는 이마다 일독을 권하며 작품을 칭찬했던 나로서는 참으로 새로운 시각에서 작품을 바라볼 수 있었던 소중한 경험이었다.
하지만, 지뢰진이 단지 무소불위, 안하무인의 주인공과 그를 위해 구성된 세계라고 단정짓기에는 아쉬움이 있다. 또한 지뢰진이 받았던 주목을 대중의 변태적이고 잔인한 기호에 의지한 일시성이라는 측면으로 파악하는 것은 좀 심한 의견이 아닐까 싶다.
만화는 상당히 종합적인 예술장르이다. 기본적인 서사가 있고 그 기본적인 서사를 지탱하는 그림이 있다. 이러한 만화를 다양한 하부장르로 나누는 척도는 (어느정도 상호보완적인 작용에 의한 것이긴 하겠지만) 서사의 측면이라기 보다는 그림의 측면이다.
따라서, 만화의 질은 서사에 맞는 그림에 의해서 좌우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기서 그림이란 사진처럼 정확한 뎃생력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이는 작가가 스토리를 배열하는 기술이나 구성력 그리고 기본적인 뎃생력, 하다못해 스크린톤을 긁는 일까지 모두 포함하는 말이다)
지뢰진은 그림만으로도 절대 악평을 받을 수 없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더티한 그림체'라기 보다는 선이 굵다고 하는 편이 낫다. 작가는 자신이 어떤 내용을 그리고 있는 가를 잘 알고 있다. 스크린톤이 주는 지나친 깔끔함을 극복한 굵은 선하며, 잔인하고 사실적인 그림은 하드보일드적인 만화의 내용에 참으로 잘 어울린다. 작가는 독자가 집중하고자 하는 장면과 집중해야만 하는 장면을 알고 있으며 또한 성공적이다.
그렇다면 문제가 되는 내용은 어떠한가. 우리는 인물을 통해서 구조를 고찰할 수 있다. 만화가 제공하는 서사는 상당히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인물의 행동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작중인물을 가장 전형적인 구분법으로 구분하자면 Protagonist와 Antagonist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이 용어는 그리스 비극에서 유래된 것인데, 소설을 비롯한 예술 전반에서 널리 쓰이는 용어이다. 물론 그 외에도 주인물과 부인물, 평면적 인물과 입체적 인물, 긍정적 인물과 부정적 인물 등의 분류법도 있다. 지뢰진의 주인공 이이다 교야를 굳이 이러한 분류법으로 나눈다면 긍정적 인물과 부정적 인물의 틀에 집어 넣어야 할 듯 싶다. 이이다 쿄야는 부정적 인물에 가깝다. 그는 지적받은 대로 악으로 악을 대한다. 지나치게 냉혹하고, 지나치게 비윤리적이다. 자신만만해 보이는 범인들이 그로 인해 난처한 지경에 놓이는 것을 상당히 즐기는 새디스트적인 기질까지 농후하게 지니고 있다. (하지만, 그가 상대하는 범인들도 그렇게 윤리적인 것 같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이이다 쿄야가 반주인공처럼 비열하고 피동적인 인물로는 보이지 않는다. 그는 확실히 만화 '지뢰진'의 주인공이다. ('범죄의 여왕'?이란 에피소드에서 쿄야가 사살된 범인의 얼굴에 옷자락을 덮어주는 장면이 있다. 그의 뒷모습에서 나름대로 냉혹함이 아닌 따뜻함을 느꼈는데.. 나의 과민반응일까?)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작중인물을 파악하는 것은 만화의 구조를 고찰할 수 있는힘이 될 수 있다. 만화의 구조를 고찰할 수 있다면 더 나아가 좋은 만화와 그렇지 못한 만화를 구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이다 쿄야는 상당한 부정성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부정적인 주인공을 작가는 어떻게 묘사하려 했는가. 부정적인 주인공을 부정적으로 독자에게 인식시키는 것도 훌륭한 창작의 작법이 된다. 잘만 쓰고 그린다면 독자에게 "저렇게 살지 말아야 겠다.."라는 교훈을 최소한 줄 수 있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작가는 고의로 부정적인 주인공을 선택해서 일종의 역설을 시도할 수도 있다. 부정적인 주인공에게 작품 내에서 인정 받을 수 있는 승화된 내면을 찾을 수 있다면 앞에서 언급한 부정적인 주인공의 부정적인 묘사보다는 독자에게 더욱 감동을 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작가는 좀 더 머리가 아플 것임에는 틀림없다. 내 생각에는 지뢰진의 작가가 좀 더 머리가 아픈 방법을 택한 것 같다.
잠깐 주제를 돌려서, 서사구조와 작중인물을 가지고 있는 예술 장르는 크게 또 두 가지로 구분된다. 인물에 중점을 두는 인물중심의 서사구조와, 사건에 중점을 두는 사건중심의 서사구조가 그것이다. 지뢰진은 엄격하게 말하면 사건에 중점을 두고 있는 작품이다. 지뢰진은 사건 중심의 에피소드로 이루어져 있고, 이이다 쿄야가 등장하지 않는 에피소드도 꽤 존재한다. 작가는 에피소드의 성격에 따라서 필요한 주인공을 교체
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범죄로 사회를 읽어내는 데에 관심있는 작가가 선택하는 에피소드는 잔인하고 엽기적인 세기말적인 범죄다. 그 범죄를 해결해 나가기 위한 주인공에겐 이이다 쿄야가 가지고 있는 쿨한 감각이 제일 적당할 것이다. 그것이 지뢰진의 주인공 = 이이다 쿄야의 등식이 성립하는 이유이다.
종합해보자면, 지뢰진은 주인공이 가진 부정성만으로 평가절하될 간단한 작품은 아니다. 이이다 쿄야가 문에 설치된 폭탄을 미처 발견하지 못하고 그가 죽인 범인들 못지않게 비참하게 죽어가도 그러한 작품 내 필연성을 독자들은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작가가 그리 쉽게 죽일 것 같지는 않다. 만화는 또한 상업적인 것이니) 지뢰진은 주인공으로 서사구조를 유지하는 작품이 아니라, 범죄로 사회를 읽어내는 사건 위주 서사구조를 가진 작품이다. 몇 편의 에피소드를 제외하면, 범죄를 저지르는 이나 범죄를 응징하는 이가 각자의 개연성을 지니고 있으며 첨예하게 대립한다. 승리와 생존이라는 명제를 가슴 속에 새겨둔 이이다 쿄야가 번번히 작가가 부여해준 축복에 힘입어 그 대결에서 승리하기는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단순한 끝은 아니다. 그건 작품을보면 확연히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작가가 나름대로 위험한 줄타기를 하고 있음에는 틀림없으나, 상당히 많은 거리를 큰비틀거림 없이 나아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난 그 줄타기가 17권, 18권 계속되길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