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미궁
용사 던전을 탐험하다.
다시 1주일 뒤인 수요일. 이로써 3번째 방문이다. 여자가 상대인 것이 다행이다. 클럽은 남자가 여자에게 자연스럽게 접근 할 수 있는 장소다. 만약 남자였다면 어떤 구실을 대고 접근할 것인지 고민했을 것이다.
클럽 바깥입구에서 계단을 거쳐 홀 안으로 들어간다. 오늘도 이 안에 여자가 있을 것인지 조바심내면서 테이블에 앉는다. 클럽안의 풍경은 여전하다. 술과 안주, 그리고 남녀.
나와는 다르게 이들은 잔뜩 기분을 만끽하며 술을 마시면서 재미있는 대화를 나누거나 신나는 음악에 맞춰 무대에서 춤을 춘다. 춤을 추는 그들의 표정에서는 근심의 흔적은 찾아 볼 수 없다. 술로 스트레스를 풀고, 댄스로 스트레스를 풀고 개중에는 마음에 맞는 남녀끼리 다른 재미를 찾아가겠지. 여기서 나는 이방인이다.
그때 본 얼굴이 있는지 댄스플로어를 살펴본다. 회장 안도 어두운 가운데 사이키델릭 조명도 번쩍거리고 사람들도 고개를 흔들거나 이리저리 움직이기에 확인하기가 쉽지 않다.
언뜻 보면 없는 것 같다. 휴대전화를 꺼내 얼굴을 다시 확인한다. 여자가 녀석에게 다가왔을 때 미리 대비해 사진을 찍어 놨다. 얼굴이라도 까먹으면 곤란하니까 말이다.
기억 그대로의 얼굴이다. 휴대전화를 주머니에 넣고 무대주위를 둘러본다. 보이지 않는다. 춤추는 사람들 중에서는 없는가 보다. 테이블 쪽으로 눈을 돌려보자. 술 마시며 앉아 있을지도 모른다.
웨이터들은 이리저리 손님들의 주문을 받고, 음식을 나르느라 분주하게 움직인다. 그들에게 방해가 안 되게 가급적 그들의 동선을 피해서 움직인다.
없다. 눈에 띄지 않는다. 오지 않은 것인가. 그날 단순히 어쩌다가 보게 된 것 뿐인가. 아직 확인하지 않은 곳이 있다. 화장실 안이라도 있는지 모르지만 곧바로 여자화장실 안에서 확인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기다려 보자.
혼자 있기 어색하니 생각난 김에 화장실을 갖다오기로 한다. 소변기에는 사람들이 차 있어 문을 열고 칸에 들어가서 좌변기에 볼일을 본다. 세면기에 가서 손을 씻고 얼굴에 가볍게 물을 묻힌다. 얼굴이 후끈거리는 것 같다. 이곳은 정말 춤추지 않아도 음악과 분위기에 열이 달아오른다.
화장실에서 나가 다시 무대 위나 테이블의 사람들을 살펴본다. 혹시 아까 놓쳤을지도 모르니 천천히 살펴본다.
그렇게 살펴 나가면서 홀 입구 쪽으로 가까이 다가갈 때이다.
이쪽, 저쪽 유심히 살펴보다가 무심코 입구로부터 들어오는 사람의 얼굴을 지나쳤는데 신호가 왔다. 다시 그쪽으로 눈길을 돌려 바라보니 이제껏 찾아다니던 그 여자다.
일행이 없이 여자 혼자 유유히 테이블 쪽으로 걸어가고 있다. 내심 틀렸구나하고 이미 마음은 집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운이 좋다고 해야 하나보다, 그렇지만 저번 때보다는 늦은 시간에 나타난 덕분에 나는 헛수고를 하고 있었던 셈이다.
여자는 이제 막 손님들이 자리에서 떠나 웨이터가 그들이 남긴 빈병들과 안주접시 등을 치우고 오물을 닦아 깨끗해진 테이블의 빈자리에 앉았다.
원래 일행이 없는지는 몰라도 여자 혼자라면 역시 혼자인 나로서는 좋은 여건이다. 다른 남자와 함께 있으면 접근하기는 무리라고 봐야한다. 여자 동료와 둘이라면 남자 혼자 다가가기도 불편하다. 여자의 테이블로 향한다.
“잠깐 앉아도 될까요?”
일단은 최대한 정중하게 다가간다.
“앉으세요.”
여자와 마주보는 자리에 앉았다. 웨이븐 진 머리에 키는 보통의 여자보다는 약간 큰 편에 속해 보인다. 얼굴은 보는 사람에 따라 예뻐 보일수도 있는 생김새라고 할까. 화장도 그리 진하지는 않아 보인다. 꾸미는 것을 좋아하지는 않는지 힘이 들어간 머리모양에 비해 다른 장신구들은 보이지 않는다.
“춤 잘 추시던데요.”
“어머, 언제 봤는데요?”
“저번 주에요. 많이 춰보셨나 봐요.”
“조금 추는 편이죠. 춤추는 거 많이 좋아해요.”
사실 춤추는 걸 보지는 못하고 호감 사려 한 소리이지만 여자에게 충분히 효과가 있는 것 같다. 얼굴에 미소를 짓고 처음 보는 나와 거리낌 없이 말을 나눈다. 웬만한 남자면 경계하지 않고 스스럼없이 대화를 나누는 타입. 이런 곳에 너무나 익숙한 사람이다.
“자주 오시나 봐요?”
“1주일에 한번 정도요.”
“저번에도 수요일이었는데. 시간대도 이때쯤이고요?”
“거의 그래요. 친구 때문에.”
정확하다. 형이 만났던 사람은 이 여자였다. 가슴속에서 뭔가 불끈하고 전류가 흐른다. 자칫 표정으로 드러날 까봐 억재하기가 힘들다. 이상하게 보이면 안 되므로 간신히 진정하고 호흡을 가다듬는다. 회장 안이 다소 어둡고 시끄럽다고 느끼는 음악소리가 들리는 게 이때만큼은 마음을 편안케 한다.
형이 결혼을 전제로 여자를 사귀고 있었다는데 그럼 이 여자란 말인가. 형이 처음에 사랑했던 여자와는 다소 차이가 있어보였다.
제일 처음 결혼을 하려 했던 형의 애인은 본 적이 있다. 나이는 나와 동갑으로 상냥하고 얼굴은 수수하지만 무척 여자답다고 여겼다. 게다가 마음씨도 착하며 상대방 배려도 잘하는 정말 좋은 여자를 만났구나 하고 내심 부러워하기도 했다. 형과 매우 잘 어울린다고 생각해서 꼭 둘이 결혼했으면 바랬다. 안타깝게도 그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그래서 지금 내 앞에 있는 여자가 형의 애인이었을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먼저 형과 결혼하려 했던 여자는 매우 조용했고 부끄러움을 많이 탔다. 앞의 여자는 오늘 처음 만난 나와 이렇게 마주보고 앉아있을 정도로 대범함이 느껴진다.
“거기도 여기 자주와요?”
“아니요. 최근에 몇 번 와봤어요. 이 근처에 사나요?”
“친구도 이 근처에 살고요. 근데 오늘은 늦네요.”
“친구도 오기로 했어요?”
“그래서 그쪽이 혼자면 조금 곤란해요.”
그러더니 핸드백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액정의 시간을 보고, 메시지가 온 것은 없는지 보더니 다시 백에 집어넣는다.
휴대전화를 흔히 일상에서 ‘휴대폰’이라 부르는데 잘못된 표현이 아닐 수 없다. ‘휴대’는 한자어인데 ‘폰’은 영어가 아닌가. ‘핸드폰’은 영어조합이니 이쪽이 더 자연스럽고, ‘휴대전화’란 말이 더 사용하기가 알맞은 용어란 생각이 뜬금없이 들었다.
일행이 오기로 되어있다니 낭패다. 여자가 둘인 만큼 남자도 둘 있는 쪽을 더 바랄 것이다. 어떻게든 더 시간을 가져 많은 정보를 얻어야 한다.
그러나 잠시 후에 내 바람과는 달리,
“미안해, 늦었지!”
여자의 일행이 기세 좋게 나타났다. 앞의 여자와는 상반되게 아담한 사이즈의 그저 그런 미모를 진한 화장으로 커버하고 있다는 인상이 짙다. 많은 액세서리를 하고 있다는 것도 이 여자와 다르다.
“깜박하고 지갑을 두고 왔지 뭐니. 그래도 일찍 생각나서 망정이지. 차는 오늘따라 왜 이리 안 오는지 추워서 혼났다, 얘.”
누가 묻기도 전에 주저리주저리 상세히도 보고한다. 말이 많아 보인다. 앞의 여자가 말한다.
“일단 앉기나 해.”
“근데 나 여기 오다가 넘어질 뻔 했다. 계단에 누가 뭐 흘렸나봐. 짜증나게.”
네가 더 짜증난다. 앉으면서도 그 입은 멈추지 않는다. 앞에 내가 있다는 것은 모르는 건가. 잠자코 보고만 있을 뿐이다. 웨이브머리의 여자가 말을 건다.
“휴대전화는 찾았어?”
“아니, 못 찾았어. 벌써 두 번째야. 이번에는 산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대화의 내용과 등장에서부터 보여준 이 여자의 행태로 봐서는 상당히 덤벙거리는 성격임을 알 수 있다.
“어, 이 남자 누구야?”
그제야 내 존재를 눈치 챈다. 이제라도 알아봐줘서 새삼 고마울 지경이다.
“안녕하세요.”
“에, 아 예, 안녕하세요.”
여전히 어벙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저번에 나 춤추는 거 봤데.”
“뭐? 아, 그래서 너한테 관심 있다는 거구나.”
이제 나도 그녀의 관심의 사정권 안에 들어간다. 덤벙이 여자가 묻는다.
“몇 살이세요?”
“스물여덟이요.”
“삼십대로 보이는데. 보기보다 젊으시네요.”
별로 상대의 기분은 고려하지 않나보다. 생각나는 대로 바로바로 내뱉는 가벼운 여자다. 삼십대로 보인다는 소리는 여기서 처음 듣는다. 보는 눈도 없다.
웨이브여자가 웨이터를 부르고 맥주와 안주를 주문한다. 한편 나중에 온 덤벙대는 여자는 나이부터 시작해서 어디 살아요? 등등 나에게 질문의 속사포를 쏴대기 시작한다.
처음 보는 사람으로부터 궁금증이란 것은 모조리 발가벗기듯이. 웨이브여자는 이 상황을 즐기는 것인지, 너무나 익숙한 상황인지 담담히 앉아 있다.
주문한 맥주와 안주가 오고 웨이브여자가 먼저 나에게 한잔 따라준다. 나도 두 여자에게 따라준다. 각자 잔을 들고 마신다. 마침 갈등을 느끼던 차라 맥주 맛이 좋다.
덤벙이여자는 간간히 나에게 질문을 하는가 하면 웨이브 여자와 대화를 나누는 것도 잊지 않는다. 잘도 지치지도 않고 떠들어대는 구나.
웨이브여자와는 다시 잃어버린 자신의 휴대전화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나한테는 다시 내 신상에 묻기도 하는 등(대답은 두루뭉술하게 대충 받아주기로만 한다) 공통의 화제 없이 양쪽 채널에서 활약하느라 바쁘다.
이런 상황에서 웨이브여자와 심도한 이야기를 하기에는 이 덤벙이가 너무 방해된다. 이 자리에 계속 앉아있게 되는 것은 좋으나 이대로는 진전이 없다. 웨이브여자도 지루해진 듯 턱을 괴고 덤벙이의 이야기를 듣는다. 턱을 괴는 것은 보통 이야기에 집중하지 않을 때 나오는 자세다. 지금하고 있는 덤벙이의 이야기에서 별로 재미를 못 느끼고 있나보다.
아니면 나에게 신경을 쏟고 있어서 이야기에 집중 못하는지도 모른다. 지금은 턱을 괴고 있지만 대화를 나누는 중에도 두리번거리거나 몸을 꼬기도 하는 등 좀처럼 몸을 가만히 두지 않는다. 상대에게 잘 보이고 싶을 때 나오는 습관인데 몸을 자꾸 움직이는 것으로 상대의 관심을 유도하려 하기 때문이다. 저런 경향이 있는 사람은 때로 거짓말도 잘 하는 수가 있다고 들었다.
과일 안주를 먹으며 이 상황을 어떻게 타파할지 골몰한다. 웨이브여자와 필요한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서라도 일단 덤벙이를 쫓아낼 필요가 있다.
“야! 저 음악 나온다. 나가자!”
웨이브여자가 좋아하는 음악이 나온 듯 동료에게 같이 무대에 올라가려한다. 내가 잠자코 있자,
“같이 나가죠?”
“춤을 잘 못 춰서. 구경 할게요.”
그러자 덤벙이 여자가 나댄다.
“그러지 말고 나가요. 재미없게!”
내가 극구 사양하자 웨이브여자가 덤벙이를 이끌고 댄스플로어로 향한다. 하여튼 덤벙이가 방해다. 마침 신경 쓰지 않고 혼자 구상할 수 있는 시간을 벌었는데 말이다. 기회를 살려 좋은 해결책을 궁리하느라 머릿속에서는 여러 가지 잡념들이 오고간다.
건너편 의자에는 여자들의 핸드백. 테이블에는 맥주병과 잔, 과일안주와 마른안주. 간간히 춤추는 두 여자에게 구경하듯이 시선을 보낸다. 춤은 덤벙이 여자도 예사 솜씨가 아닌 듯 음악에 맞추어 신나게 흔든다.
문득 저 핸드백 안에는 어떤 것들이 들었을까 궁금해진다. 대충 화장품이나 지갑내지는 휴지 정도는 있겠지. 그리고 또 뭐가 있을지 한번 열어보고 안을 확인하고픈 유혹을 느낀다. 하지만 내 쪽으로 간간히 시선을 주면서 춤추고 있는 그녀들 앞에서 대담하게도 도둑으로 몰릴 짓은 할 수 없다.
그러고 보니 웨이브여자의 핸드백 안에는 휴대전화도 들어 있다. 아까 꺼내서 사용하고 백에 도로 집어넣었다. 반면에 덤벙이는 휴대전화를 잃어버렸다고 했으니까 지금은 없다.
그 밖에 또 무엇이 들어있을지 무심코 사유하던 중 왜 이런 쓸데없는 사색을 하고 있나하고 제정신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무심코 한 생각이나 행동에서 기대치도 않았던 돌파구가 열릴 수도 있다. 방금 전의 내가 그랬다. 뇌에 전구가 들어온다.
휴대전화다. 여자의 휴대전화로부터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형과의 통화기록이 있을 것이고 문자메시지를 주고받았을지도 모른다.
신나게 몸을 푼 두 여자가 자리로 돌아온다. 내가 두 여자의 잔에 맥주를 부어준다. 시원스레 들이붓고 말한다.
“와! 기분 좋다.”
“아, 덥다.”
“두 분 다 잘 추시네요.”
빈말이 아니다. 작전은 짰으니 작전을 실행할 여건을 조성해야 한다. 죄 없는 자에게 나쁜 짓을 하려니 내키지 않아도 나도 사정이라는 것이 있다. 거기다 의심만 씌우는 것으로 끝날 테니 적어도 덤벙이는 무죄다.
기회의 시간이 주어지기를 고대하고 있자니 웨이브여자가 일어선다.
“맥주 마셨더니 금방 신호가 오네.”
기회의 시간이 주어진다.
“나랑 같이 가!”
여전히 위기를 제공한다.
지금 여기서 나 혼자 남게 되면 일이 크게 뒤틀려진다. 급히 일어선다.
“잠깐, 저도 급한데 그쪽이 좀 있다 가시죠. 아까부터 가고 싶었는데.”
나는 덤벙이에게 부탁한다. 이에 그녀는
“혼자 있을 때 갔다 오지 그랬어요?”
“그쪽들 물건이 있으니까 아무도 없이 자리를 비울 수 없잖아요.”
이 말은 참 잘한 것 같다. 의도하지는 않았는데 두 여자로 하여금 나름 신용 있게 보이는 데에 한 몫을 할 것이다.
“저는 금방 올 거예요.”
그리고선 웨이브여자에게 화장실의 위치를 모르는 척 따라나서고 덤벙이를 남겨둔다.
1단계로서 상황 만들기는 조성이 됐다. 아까 소변을 한 번 봐서 그런지 요의도 느껴지진 않는다. 대충 갔다 온 척 손만 씻어 시간을 보낸 뒤 신속히 본래 자리인 테이블로 향했다.
웨이브는 아무래도 여자이니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 잠깐의 시간동안에 완수해야한다.
빠른 걸음으로 덤벙이가 기다리는 테이블에 다다랐다.
“빨리 왔죠. 갔다 오세요!”
“제가 가면 그쪽 혼자잖아요. 아까 그래서 안 갔다고 했잖아요.”
아차! 아까 한말이 참 잘한 건줄 알았는데 발목을 붙잡히게 할 줄이야.
“맞아, 아까 그랬었죠.”
“언니 오면 갈게요. 빨리 좀 오지.”
빨리 오면 안 된다 말이다, 요것아!
4화 스틸
용사, 던전에서 여마법사와 싸우다
당황해서 그런지 등 뒤로 땀이 흐르는 것이 느껴진다. 시간은 흘러가고 내 머리도 빠르게 회전한다. 웨이브가 없는 지금 돌파구를 찾아야 한다.
눈에 들어온다. 덤벙이 여자가 마른안주를 오물거리면서, 한손에는 맥주가 든 잔을 들고 있는 상태로 무대 위의 춤추는 사람들을 보고 있는 모습이.
내 초점이 한 물건으로 모아진다. 여자의 맥주잔을 들고 있는 하얀 팔에 채워져 있는 손목시계.
머리의 회전이 멈춘다. 시계에 의해 퍼뜩 떠오른 아이디어가 공격을 개시한다.
“지금 몇 시죠?”
“지금요? 어머!”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다. 내 요청에 시계를 보려고, 미처 손에 맥주를 들고 있다는 것을 깜박해서 벌어진 일이다. 조건반사적으로 시계를 보려 팔을 비틀자 잔에 든 맥주가 그녀의 앞으로 쏟아져 버린다.
“어머나! 이게 뭐야! 옷 다 버렸잖아!”
쏟아진 맥주로 인해 그녀의 가슴팍에서부터 옷이 다 젖어버렸다.
“이런!”
재빠르게 냅킨을 여러 장 집어 그녀의 자리로 이동한다. 휴지를 건네주자 젖은 옷의 물기를 닦기에 여념이 없다. 고개를 숙이고 시선은 젖어있는 옷에 고정.
옷을 닦는데 정신없는 틈을 타 웨이브 여자의 핸드백으로 한손을 가져간다. 몸 정면은 그녀를 향한 채로 옆으로 뻗은 한 손으로 과감하게 핸드백 지퍼를 내린다.
아까 사용하고 넣은 터라 가장 위에 있던 휴대전화를 신속히 빼내어 바지 뒷주머니에 집어넣는다. 그리고 잊지 않고 열린 지퍼를 다시 닫는다.
내가 생각해도 물 흐르듯 자연스럽고 번개 같이 신속한 동작. 처음 해 본 일이다.
가장 어려운 2단계를 통과하고 안도의 숨을 쉰다.
“뭐 해?”
아이, 깜짝이야!
“나 몰라, 이 사람 때문이야!”
이렇게 울상 섞인 소리를 지르며 화장실 방향으로 사라진다. 나 때문인 것은 맞다.
“무슨 일이예요, 쟤 옷은 다 젖고?”
“사고가 좀 생겼네요.”
사고의 경위를 대충 말하자,
“하여튼, 칠칠맞게 덤벙 거린다니까. 조심 좀 하지.”
하고 말한다. 그 사고가 일어나기를 바라고 계기를 준 것은 나다. 하지만 계기를 줬다고 해서 반드시 사고가 일어나지는 않는다. 내가 그 상황을 들려줬음에도 웨이브 여자는 덤벙이가 옷을 적시게 된 것은 원인이 덤벙이 자신이라고 확신한다.
내가 덤벙이라고 그녀를 칭하는 것처럼 웨이브 여자도 그녀가 방정맞고 조심성이 없다는 것을 잘 안다. 그래서 웨이브도 덤벙이 본인의 실수라고 여기지만 실은 그렇지가 않다.
아까 그녀처럼 무심코 한손에 내용물이 든 컵을 든 상태에서 그 팔의 손목에 찬 시계로 시간을 보려한다면 대부분 불상사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그 이유는 본인 스스로 시계를 봐야겠다고 먼저 사고를 하고 본 것이 아니라, 옆에서 몇 시냐고 묻는 것에 사고를 하기 전에 이미 본능적으로 시계를 보는 자세를 취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누구나 갖고 있는 본능에 의해 벌어진 사고이기 때문에 덤벙이 탓이라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요즘은 대부분 휴대전화를 많이 갖고 다니기에 굳이 시계를 차는 사람은 많지 않다. 시간을 볼 때면 대게 휴대전화의 액정에 나오는 시계를 보는 것이 요즘의 습관일 것이다. 다행이도 덤벙이 여자가 손목시계를 보는 자세를 취하게 된 것은 그녀가 현재 처한 환경이 그리 되도록 만들었다고 할까.
그녀는 며칠 전부터 휴대전화가 없는 상태이고 그래서 오늘 같은 날 시계를 차고 왔다. 거기에 오늘 약속시간보다 늦어져 오는 도중에도 시간을 확인하면서 왔을 것이다.
짧은 기간이지만 자신도 모르게 휴대전화 대신 시계를 차고 있다는 것을 잘 인식하게 되었고 당연히 그에 따른 행동으로 도출이 된 것 뿐이다.
웨이브여자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사람들은 어떤 외부적상황은 고려치 않고, 그 사람의 성격, 태도, 가치관 등과 같은 그 사람의 내부성향에서 원인을 찾는다. 이런 현상은 원인을 제대로 찾지 못하는 귀인 오류 중의 하나다. 사람들은 이렇게 외부상황 탓을 하기보다는 사람 내부 탓을 많이 하는 귀인 오류를 자주 범하는데 그런 오류를 '기본 귀인 오류'중에서 ‘내부 귀인 오류’라고 한다.
덤벙이가 옷을 젖게 된 상황보다 덤벙이의 성격 탓으로 오해하고 있는 ‘내부 귀인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일상생활에서 많이 저지를 수 있는 오류이다.
누군가 길가에 쓰레기통이 없어서 쓰레기를 길에 그냥 버릴 때 그것을 본 사람은 쓰레기통이 없는 환경에 주목하기보다 버린 사람이 원래 도덕적이지 못하다고 단정할 소지가 많다.
덧붙이면 ‘내부 귀인 오류’는 자신보다 타인에게 적용시키는 일이 훨씬 더 많다. 같은 상황이라도 자신에게 적용할 때는 내부 귀인을 거의 하지 않는다. 만일 웨이브여자가 사고의 당사자였다면 본인 탓보다 상황 탓을 했을 것이다. 거꾸로 자신에게 일어난 원인을 외부에서 찾는 것을 ‘외부 귀인 오류’라 한다.
사람은 수없이 오류를 범하고, 이후에는 그 같은 실수를 안 하려해도 같은 오류를 자꾸 범하게 되는 것을 반복한다. 그런 오류 중에 가장 많이 발생하는 심리적 오류가 ‘기본 귀인 오류’이다.
뭐 여기서 이게 중요한 것은 아니고, 덤벙이가 없을 때 여자와 대화를 나누자. 자리에 앉은 웨이브여자는 테이블에 흘려 있는 맥주를 닦고 있고, 나는 바지 뒷주머니에 넣어뒀던 여자의 휴대전화를 바지 앞의 주머니로 옮겨 넣는다. 재수 없게 여자로부터 어디서 전화라도 오면 내가 갖고 있다는 것을 들키겠지만 주위의 음악소리가 크므로 금방 벨소리를 못들을 것이고 그사이 연결을 끊어버리면 된다.
“핸드백까지 맥주가 튀었잖아.”
그녀가 휴지로 자신의 핸드백에 묻은 물기를 닦는다. 그러다
“어, 왜 지퍼가 열려있지?”
그 말에 맥박이 뛴다. 성급히 잠그느라 완전히 지퍼가 닫히지 않았나 보다. 핸드백을 열어보고 내용물을 확인할지도 모르겠다. 여기서 크게 위험한 일은 아니니 수완으로 가볍게 넘겨야겠다.
핸드백을 열고 구석구석 확인하더니 심각한 표정이 되어
“내 휴대전화가 어디 갔지?”
들켰다. 그러나 태연히 접근하자.
“왜 그러세요?”
“휴대전화가 없어졌어요?”
“그럴 리가요? 잘 찾아보세요.”
다시 핸드백을 뒤지고는 확실하다는 듯이 체념하고 팔짱을 낀 채 골몰한다. 뭔가를 조합한 예감에서 결론이 난 듯
“얘가 가져갔구나!”
하고 덤벙이의 핸드백을 뒤진다.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바로 덤벙이가 가져간 것으로 추정하고 서슴없이 그녀의 핸드백을 뒤지고 있다.
“없잖아, 가지고 있나?”
“잠깐만요, 그런데 왜 그녀를 의심하죠?”
“아까 얘 혼자 있었잖아요. 얘가 틀림없어요.”
그녀와 내가 화장실에 함께 갔을 때를 말한다. 그래도 그렇게 쉽게 동료를 의심 할 수 있는지가 의아했다.
“휴대전화가 없으니까 내걸 훔친 거라고요.”
그것까지 의도한 것은 맞지만 너무 의심이 빠르다. 덤벙대고 가벼운 성격이 남으로부터 믿지 못하는 이미지를 심어준 것인가.
“남의 것 가져가봐야 쓰지도 못하잖아요.”
“…….”
내 말에 수긍하는 것인지 아닌지는 몰라도 쉽게 의심을 풀지 못하는 표정이다. 오늘 처음 만난 남인데도 나는 용의자로서 완전히 사정권 밖의 인물로 제외됐나보다.
분실신고를 하면 남이 자신의 휴대전화를 사용할 수 없다. 이 정도는 이 여자도 잘 알 것이다. 사용하지도 못하는 전화를 덤벙이가 정말 훔쳤다고 생각하는 건가. 의심의 이유가 ‘브리지’라는 방법이라도 알고 있어서는 아니겠지.
속칭 쁘랏치라는 일컫는 수법은 불법으로 단말기의 일련번호를 바꾸는 거다. 휴대전화 개통할 때 단말기 일련번호를 입력을 해야 그 단말기가 개통이 된다.
그러나 분실 전화는 일련번호 입력 시에 분실 전화로 등록되어 일련번호 등록해서 개통 자체가 되질 않는다. 그런데 쁘랏치라는 것은 원래 개통되어있던 전화의 일련번호를 줍거나 훔친 단말기에 복사를 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쁘랏치를 한사람의 기존의 전화기와 쁘랏치를 한 전화기 둘 다 사용가능하다. 누가 이 사람에게 전화를 걸면 남의 것을 쁘랏치한 전화기와 원래 사용하는 전화기의 벨이 함께 울린다. 전산 상에는 원래 전화기의 일련번호가 등록되어 그 전화기를 사용하게 되어있는데 남의 전화에 그 일련번호를 복사해서 넣었으니 전산에는 원래 전화가 등록되어있지만 이 사람은 일련번호가 같은 전화가 두개이므로 함께 사용 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불법이고 이렇게 사용할 경우 기지국상 하나의 일련번호로 두개의 전화가 다른 지역에 있는 것이 확인되므로 적발이 된다. 적발이 되면 2000만 원 이하 혹은 10년 이하의 징역에 처하게 된다.
그래서 굳이 쁘랏치한 전화를 사용하려면 전화 하나는 꺼놓고 사용해야한다. 두개가 함께 켜있으면 적발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쁘랏치가 엄연한 불법이고 하게 되면 위에서 말한 것처럼 강력한 처벌을 받아야 한다.
남의 휴대전화를 훔치는 것은 절대 해서는 안 될 일이고 주운 휴대전화는 반드시 주인에게 돌려주도록 해야 한다.
“아이, 짜증나. 사람도 많은데 창피하잖아.”
잡념은 사라지고 자리에 덤벙이가 돌아왔다. 이곳에 의외의 사태가 발생한지도 모르고.
“화장실에 사람은 왜 이리 많은지…….”
그녀의 수다가 시작된다. 나는 맥주를 마시며 상황의 추이를 지켜본다.
“그쪽 때문이잖아요. 난데없이 시간을 물어가지고, 하필 맥주 마시고 있는데.”
그 말에 따로 할 말은 없다. 허나 그게 문제가 아니다.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것을 슬슬 감지 할 때가 올 텐데.
몇 마디 더 웨이브여자를 향해서도 얘기를 걸어보지만 심드렁한 대답에 표정이 심상치 않음을 느꼈는지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기분 나빠 보이는데.”
“…….”
웨이브여자의 무응답에 덤벙이는 어벙한 눈이 되어 나를 쳐다본다. 나에게 설명을 요구 하듯이.
“그쪽이 또 뭔가 실례했죠?”
“아니, 그게 아니라…….”
내가 얘기할까 하다가 웨이브여자에게 넘기기로 한다.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조용히 넘어갈지, 아닐지는 웨이브에게 달려있다.
“뭔데 그래?”
“휴대전화가 없어졌어.”
“뭐? 휴대전화가 없어져? 너도 잃어버렸구나!”
“……."
상황파악능력이 상당히 뒤떨어진다. 괜히 내가 민망해진다.
“언제, 어디서 잃어 버렸는데?”
“조금 전에.”
“여기서 잃어버렸다고? 언제?”
여기서 내가 살짝 끼어든다.
“아까 저랑 화장실 갔다 온 뒤에 없어졌답니다.”
“아까? 그땐 내가 지키고 있었는데.”
이해가 안 간단 표정이다. 그러나 어이없어 하는 표정으로 순식간에 바뀌며
“뭐야, 혹시 날 의심하는 거야?”
“……."
상대의 긍정인지 부정인지 모를 침묵. 그러나 곧 말없음이 긍정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빨리도 알아챘는지
“말도 안 돼! 나 아니란 말이야!”
그래도 상대가 대답이 없자 사태의 불리함을 깨달은 듯이 얼굴이 빨개진다.
“다 뒤져봐! 나 안 가져갔으니까.”
하며 자신의 핸드백도 열어 보이고 하지만 상대의 냉담한 태도에 질렸다는 듯이
“너 예전 일 갖고 날 의심하는거야? 그게 언젠데!”
덤벙이의 말에 또 다른 의문의 요소가 튀어나온다. 웨이브가 그녀를 의심하는 것에 크게 관련된 뭔 일이 있었나 보다.
“웃기지마, 나 아니란 말이야, 기분 나빠 갈래!”
덤벙이는 자신의 핸드백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 가버린다. 그녀로서는 최악의 행동이다. 웨이브여자로부터 도망치는 것으로 밖에 보이기가 십상이다.
웨이브가 맥주를 따라 마신다. 넌지시 내가 말을 건다.
“쓰지도 못하는 물건을 훔쳤을까요?”
말을 아끼듯 한참 후에 얘기한다.
“꼭 필요해서가 아니에요.”
“그럼 왜?”
“아마 못쓰게 부숴서 없앨걸요.”
조금 이상한 얘기였다. 왜 그런 짓을 하는지.
“예전에 내 물건 중에 한 가지가 없어진 적이 있었는데 알고 보니 쟤가 나도 모르게 가져간 거였어요. 망가진 채 집 밖 쓰레기통에 있었어요.”
덤벙이가 말했던 예전 일이란 것이 이것임을 알았다.
“그러니 쟤 짓이 분명하죠.”
과거에 덤벙이가 그런 짓을 했던 적이 있기에 그녀를 의심하는 것이다. 비교적 많은 사람들에게 볼 수 있는 현상이다. ‘낙인 효과’가 발동 된 것이다.
범행을 저질렀던 전과자라든가, 안 좋은 병이 있었다든가, 이혼한 사람들을 안 좋게 보는 것과 같다. 과거의 그런 경력 때문에 사람들이 편견을 가지고 보게 되는 것이다. 마치 먼 과거에 죄를 지어 낙인이 찍힌 범죄 경력자를 사람들이 멀리하고 꺼리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낙인 효과’라고 한다.
그녀에게서 발동한 낙인 효과로 인해서 나는 전혀 의심조차 받지 않고 용의자 혐의에서 완전히 비껴간 셈이다. 덤벙이 혼자 테이블을 지키게 놔둔 전략도 유효했지만 말이다.
“그런데 그때는 왜 그쪽 물건을?”
“제가 미워서 그랬대요.”
“미웠다고요?”
“저랑 싸워서 사이가 좀 안 좋았거든요.”
그런 이유인가. 그런데 이번에는 전혀 그런 일을 벌일 동기도 없는데 대번에 덤벙이를 의심하다니 역시 낙인효과라는 것은 무섭다. 한 번 찍힌 낙인의 효과가 상대가 자신을 대하는 마음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이 이 정도나 큰 것이다.
주변은 여전히 술과 춤과 대화와 어우러져 즐거이 시간을 만끽하는 사람들로 시끌벅적하다. 반면 내 앞에 있는 여자는 좋던 기분이 모두 날아간 듯 조용하다. 그리고 그 반대편은 일련의 과정으로 여기까지 맞이한 이 상황에서 이제 이 여자의 진정한 정체가 무엇인지 근본으로 돌아가려는 내가 있다. 과연 형과 이 여자의 정확한 관계는 무엇인지.
더 이상 여기에 있기가 힘들어졌는지 여자가 일어선다.
“가게요?”
“오늘은 이렇게 되네요.”
핸드백과 계산서를 들고 클럽 출구로 가버린다.
‘어쩌지?’
급한 마음에 나도 일어서 그녀를 쫓아가려다 그만 살짝 미끄러진다. 그 바람에 옆 테이블에 앉아 있는 사람과 부딪쳤다. 내 자리에까지 흘러온 바닥에 있는 아까 쏟은 맥주의 일부분을 밟고 중심을 잃은 것이다. 부딪힌 사람에게 급히 사과하고 다시 여자를 쫓아 가려는데 출구부위에서 그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어느새 계산을 마치고 계단을 오르고 있나보다. 서둘러 홀 출구로 달려가 바깥으로 통하는 계단을 오른다.
도리어 급하게 달린 것이 장애가 되어 계단에서도 미끄러져 크게 넘어질 뻔 한다. 나도 모르게 거친 말을 내뱉고 계단을 보니 한쪽에 치우쳐진 물기가 있었다.
쫓는 것에 신경 쓰고 달리느라 하필 물기 있는 계단에 발을 디딘 것이다. 이 순간에 덤벙이가 나타나면서 계단에 누가 흘렸는지 모를 무엇 때문에 넘어질 뻔 했다는 말이 떠오른다.
바깥으로 나와 좌우 양쪽을 둘러보지만 이미 그녀의 자취는 사라졌다. 별 수 없이 다음에도 다시 만날 수 있기를 빌어야겠다. 그 전에 주머니 속 그녀의 휴대전화로 단서를 얻어 보자.
차가 서 있는 곳으로 걸어가면서 그녀의 휴대전화를 꺼내서 열어보니 비밀번호로 잠겨있다. 여기서 확인 하는 것은 불가피하니 어차피 집으로 갈수밖에 없다.
운전대를 잡고 차에 시동을 건다. 오늘은 여러모로 피곤하니 일은 내일로 미루고 바로 잠을 청해야겠다. 차는 도로로 빠져나와 내 안식처로 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