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물입니다>> 악의 분위기

by 귀염이 posted Jun 03,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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惡의 분위기

( 신 경국 / 작 )


1>>

초 겨울 늦은 밤의 공기는 무척 습하고 약간은 찌뿌둥했다. 오전부터 잔뜩 흐려 있던 하늘이 기어이 비를 쏟기 시작해서 어느덧 밤을 맞게 되었다. 겨울비 치고는 아주 많은 양의 비였다. 보통 비가 아닌, 만약 우산을 펼쳤더라면 우산에 구멍이 나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로 기세 등등한 장대비였다.
한 대의 자동차가 그 비를 뚫고 달리고 있었다. 그 차는 주인 만큼이나 말쑥한 모양을 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스포츠 카'로 부르는 그런 유형의 차였다. 그 자동차는 서울을 벗어나, 건물의 모습이 거의 보이지 않는 외곽 쪽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그 차를 운전하고 있는 사람은, 현재 연예계의 스팟 라이트를 한 몸에 받고 있는 인기 절정의 여배우 박 경숙이 타고 있었다.
스크린에 나타나는 그녀의 모습은 그녀가 맡은 역할은 둘째치고라도, 너무나도 인상적이고 매혹적이라는 것이 평단과 관객들의 공통된 평이었다. 무슨 생각엔가 빠져 있는 듯한 멍한 얼굴로 귀걸이를 만지작 거린다든지, 혹은 머리를 온통 헝클고서 히스테릭한 웃음을 자아내는 모습등은 그녀의 영화를 보는 모든 사람들을 열광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녀는 이른바 '섹슈얼한 이미지'를 장점으로 내세운 배우는 아니었다. 물론 그녀의 복합적인 이미지 중에는 섹슈얼한 면도 없진 않았으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그녀는 인간의 진짜 모습을 추구하는 그런 영화에 출연하여 그야말로 '신들린' 연기를 보여주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연기자였다.
자동차는 한참이나 달린 후, 한 채의 집만이 덩그라니 놓여있는 벌판 앞에 멈추더니, 장대비 속에 그녀를 토해 놓듯이 내려 놓았다. 그녀의 집은 '톰 아저씨의 오두막'을 생각나게 했다. 그것은 그녀의 집이 통나무로 만들어졌다던가, 혹은 오두막같이 아담한 풍채를 하고 있었다던가하는 그런 외관적인 요소에서 풍기는 인상은 절대 아니었다. 오히려 그 집은 튼튼한 시멘트와 벽돌로 지은, 비록 단층뿐이지만 장광한 외관에서 풍기는 모습이, 주변의 황량한 벌판과 묘한 대비를 일으키는 풍채 당당한 저택이었다.
이런 곳에 땅을 사서 집을 짓는다는 것은 그녀의 남편의 생각이었다. 평소 조용하고 이웃이나 사람들로부터 간섭을 받기 싫어하는 그녀의 성격과 잘 맞아 떨어지는 아이디어였다. 그녀는 이 집에 이사를 하던 때를 생각했다. 그때는 남편과의 미래에 대한 꿈으로 한창 행복해 하던 시절이었다. 물론 그들은 갓 결혼한 신혼 부부는 아니었다. 그녀가 국내의 유수한 영화제에서 수상한 경력으로 온 세인들의 관심과 사랑을 한 몸에 받기 시작한 때였고, 남편 또한 감독으로 데뷔한 첫 영화로 평론가들로 부터 '당차고 감각적인 영상'으로 주목 받기 시작했을 때였다.
그들은 행복하고 새로운 인생을 누리고 싶어했다. 둘은 모두 연예인으로서의 조용한 삶을 원했으며, 일상으로부터의 일탈된 생활을 하고 싶었다. 물론 은퇴하기엔 둘은 너무나 젊었으므로, 일로부터 완전히 소외되지 않는 그런 장소에서 새로운 결혼 생활을 시작하고 싶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녀의 마음 속에 의문이 생겼다. 지금은 그녀 혼자였다. 일을 사랑하고 그녀와의 단란한 가정을 원했던 남편은 이제 그녀의 남자가 아니었다. 남편은 그녀를 떠났고 그녀는 혼자다. 그녀에겐 기다림도 자포자기의 마음도, 그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저 고집을 부리며, 그가 법적으로나마 남편으로 남아있는 것에 당황스럽지만 안주할 뿐이었다. 슬픈 일이지만 사실이다.
경숙은 자신이 너무 오랫동안 빗속에 서있었음을 깨달았다. 으슬으슬 한기를 느끼며 그녀는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 문을 향해 달려갔다. 어두움과 흠뻑 맞은 비의 한기 탓으로 손가락이 떨려왔으므로, 그녀는 열쇠를 꽂는데에 무척 애를 먹었다. 드디어 문이 열리고 집 안으로 들자, 집 안의 안락함과 온기가 그녀를 푸근히 감쌌다. 그녀의 마음이 약간 진정되었다. 그러나 또다시 밀물처럼 밀려오는 외로움에 몸을 떨었다. 집에서 그녀를 기다릴 사람도, 그녀가 기다려 줄 사람도 모두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경숙은 그녀의 남편과의 관계가 어디서 부터 잘못되었는지 생각해 보았다. 모두 그 여자 탓이란것은 더 이상의 생각도 필요하지 않았다.
그 못된 여자가 나타나고부터는 모든 것이 달라졌다. 밖으로 나도는 남편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하기 시작했을 때엔 이미 늦었다. 남편이 경숙에게 이혼을 요구해 왔을 때엔 이미 그들의 관계가 깊어진 후였다. 남편과 그 여자는 서로 진실하다고 생각했었음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경숙은 꽤 늦게까지 남편을 믿었었다. 남편은 순진한 바보이고, 나쁘고 사악한 것은 바로 그 여자였던 것이다. 하지만 경숙은 나중에 가서야 사실을 깨달았다. 순진한 바보는 없고, 나쁘고 사악한 사람이 '둘'이었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들 둘에게 있어서 경숙은 '눈엣 가시'였을 것이다. 그런 생각이 그녀를 더욱 화가 나게 만들었다. 신인 감독으로서 그 역량을 충분히 발휘했을 뻔한 유능한 남편과, 언제나 가르랑거리는 목소리로 '감독니임'하고 불러대며 주위를 맴돌았던 그 여자. 모든 일이 그렇듯이 대수롭지 않던 처음과는 달리 엄청난 사태로 발전된 것을 경숙이 파악하고부터는 남편도, 경숙도 고집을 부렸다. 결코, 그들은 서로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았다. 경숙과 남편은 결국 별거 생활로 들어서서 오늘에 이르게 되었던 것이다.
경숙은 불쾌한 생각을 떨치려는 듯이 검은 색의 구두를 벗어서는 세차게 집어 던졌다. 현관으로 올라선 그녀는 피곤한 동작으로 비에 젖어 축축한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녀는 현관을 거쳐 어두운 거실로 들어섰다. 벽을 더듬어 찾은 스위치가 그녀의 손가락에 의해 '탁' 소리를 내며 올려졌다. 거실의 양 벽에 붙은 두 개의 전구가 실내를 어슴프레 비춰 주었다. 푹신한 카페트와 부드럽고 따뜻한 빛깔의 벽지와 커튼 등의 낯익은 실내 풍경이 그 날 밤엔 그녀에게 전혀 '새로운 기분'을 안겨 주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것은 '이상한 기분'이었다. 경숙은 갑자기 몸을 움츠렸다. 그러나 그것은 추위 탓만은 아니었다.
경숙은 어두운 거실을 지나 방으로 들어가려다, 문득 방문 옆에 있는 전신 거울에 비쳐진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런데 그녀는 또 한 번 섬칫함을 느꼈다.
'저것이 내 모습이란 말야? '
비에 젖어 착 달라 붙은 길고 검은 머리는 코트 위에 생긴 균열같이 보였고, 흙탕물이 튄 스타킹과 치마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얼굴은... 얼굴은 비에 젖어 더욱 이상해 보였다. 백짓장같은 새하얀 얼굴에 검붉은 입술, 아이라인과 마스카라가 번져 시커먼 음영을 드리운 눈, 그러한 모습이 전구의 역광으로 인해 마치 마녀같은 영상으로 거울에 비쳐졌던 것이다. 그 순간, 거울에 연관된 그녀의 기억이 되살아 나기 시작했다.

거울.....  비명......  죽음......
기억은 먼 옛날로 치닫고 있었다.

2>>

어린 경숙에게 거울은 신기하고도 무서운 대상이었다. 거울 속에 존재하는 또 하나의 자신이 그녀는 신기한 친구처럼 느껴질 때가 많았다. 하지만 그것은 그녀의 친구인 동시에 한 명의 적이었다. 그녀 자신을 '흉내내려는' 음흉하고 꺼림칙한 대상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은 그리 걱정할 바는 아니었다. 똑같이 생긴 두 사람이 서로 자신이 진짜라고 우긴다면 분명 무서운 일일테지만, 거울 속의 그녀는 단순한 '흉내쟁이'에 불과했다. 거울 속의 또 하나의 그녀는 목소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경숙이 5살 되던 어느 해 봄날에, 그녀는 어두운 방의 한 구석에서 엄마의 손거울을 가지고 놀고 있었다. 눈을 길게 늘여 보기도 하고, 양볼을 불룩하게 부풀려 코 끝을 위로 한 껏 밀어 부치기도 했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우스운 모습에 깔깔거리던 경숙은 느닷없는 비명소리에 놀라 거울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그리고 뒤이어 첨벙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의 눈이 거울에서 떨어졌다. 그녀는 너무나 갑작스럽고 놀란 나머지 어두운 방 구석에서 우두커니 서 있기만 했다. 놀라움에 뛰는 가슴을 온 몸으로 느끼며 떨어진 거울을 바라 보았다. 거울은 깨어져 있었다.
잠시 후, 실은 매우 급속한 행동의 변화였다- 정신을 차린 경숙은 알 수 없는 소리에 대한 호기심으로 창호지에 침을 묻혀 구멍을 뚫고는 밖을 바라 보았다. 우물이 보였고, 그 옆에는 그녀의 할머니가 꿈쩍도 않는 모습으로 서있었다. 할머니의 모습은 아주 기묘했다. 그녀는 숨이 차는지 온 몸을 들썩이고 있었으며, 두 눈은 우물 안의 무언가를 바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머리를 너무 정성들여 빗어 올린 나머지, 숱이 많이 빠진 희끗희끗한 머리카락 사이로 누런 두피가 보이는 할머니의 얼굴은 아주 이상야릇하게 보였다. 하지만 너무 어린 나머지 당장은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나이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경숙은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 상상할 수 있었다. 할머니가 건방진 하녀를 우물 속에 밀어 넣은 직후의 모습을 만 것이다. 노망이 들어 제 정신이 아닌 할머니와 말대답 잘하게 생긴 입매의 젊은 하녀. 주름 투성이에 뼈만 앙상하게 남은 할머니의 손이 젊고 건강한 하녀를 어떻게 죽일 수 있었을까? 하지만 할머니는 그 때 미쳐 있었다. 아마도 하녀보다 두배 가량 이상의 힘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 일이 있은 후 경숙은 의도적으로 할머니를 피했다. 어른들은 노인네의 정신이 이상해져 빚어진 일로 얼버무리고 있었지만, 어린 경숙은 할머니가 저지른 행동이 아주 엄청난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정의의 힘보다 재력의 힘이 더 강했던 시기였으므로, 대지주의 부인인 할머니는 법의 심판을 받지 않을 수 있었다.
후에 경숙의 가족들 만이 서울로 올라오게 되었다. 할머니와는 떨어져 살 수 있었지만, 그 날 창호지의 구멍을 통해 본 할머니의 얼굴은 그 이후로 경숙의 마음 속에 생생한 공포로 자리잡게 되었다. 눈을 부릅뜬 검버섯 투성의 얼굴, 경련으로 떨고 있던 할머니의 두 손. 그런 공포감은 결코, 어느 순간에도 지워지지 않았으며, 경숙이 아홉살 되던 해까지 집요하게 따라 다녔다. 그녀가 아홉살 되던 해에 할머니는 죽었으며, 그 소식이 서울의 아들 가족들에게도 전해졌다. 그 때 얻은 해방감이란… 몇 년 동안 경숙을 억눌러 왔던 할머니에 대한 두려움…. 그것이 할머니의 죽음과 함께 사라졌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믿음은 옳지 않았다. 그 공포는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다만 그녀의 의식 속에 숨어 있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20여년이 지난 지금, 비를 맞고 거울 앞에 서 있는 경숙의 머릿 속에서 그 잠자던 공포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경숙은 언짢은 기분으로 몸을 돌려 방문 쪽으로 다가갔다. 그녀는 문을 열지 않고 잠시 머뭇 거렸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거울을 바라 보았는데, 거울 속의 마녀도 문고리를 잡고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3>>

경숙은 방으로 들어가 축축한 옷을 모두 벗어 던졌다. 매우 가볍고 부드러운 침실복을 맨 살 위에 걸쳤다. 그녀는 화장대 앞에 앉아서는 ‘거울’을 들여다 보면서 젖은 머리를 타월로 닦기 시작했다. 그녀는 몹시도 지쳐 있었다. 지금의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뜨거운 목욕물과 항기로운 거품, 그리고 커다란 침대에서 무감동하게 혼자 누릴 깊은 잠 뿐이었다.
경숙은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기 위해 욕실로 천천히 걸어갔다. 세탁기에 젖은 옷들을 넣고 세탁 타이머를 맞춰 놓은 후, 그녀는 욕조의 수도꼭지를 틀었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뜨거운 물이 쏟아졌다. 도기의 욕조 바닥을 때리며 올라오는 온수의 김이 그녀의 코를 자극했다. 보일러 수도관 특유의 쇠 냄새가 느껴졌다. 약간 비릿한… 철의 냄새. 하지만 그녀는 그 냄새가 약간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약간 비릿하고… 약간 끈끈한 느낌의… 피비린내…
날씨 탓일까?
온수의 냄새가 경숙의 머릿속에 있는 또 하나의 다른 기억을 흔들고 있었다.

경숙은 몇 년 전에 촬영했던, 자신의 대표 작품 중의 하나인 ‘공기’란 제목의 영화의 한 장면을 생각했다. 그 영화는 암시와 분위기에 쉽게 흔들리는 인간의 나약하고 묘한 심리를 다룬 영화였는데, 여배우로서의 그녀에게 매우 중요한 수상경력을 안겨준 매우 성공적인 영화였다. 그 영화에서 그녀가 연기한 역은 예민하고 다소 비정상적인 감수성을 지닌 남편의 오해를 받아 죽임을 당하는 착실하고 예의바른 성격의 아내였다.
경숙은 콸콸 쏟아지는 물줄기를 바라 보며, 그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회상했다. 그 장면 역시 욕실을 배경으로 하고 있었다. 그녀는 크롬으로 도금되어 매우 반짝거리는 샤워기 아래에서 물을 맞고 있었다. 비누 거품을 즐기듯 연기하는 그녀의 입에서 마지막 대사가 흘러 나온다.
“ 오늘은 비누 향기가 이상하군…. “
욕조를 가린 방수포 커튼이 살짝 걷혀지며 알몸의 남자가 모습을 나타낸다. 그는 그녀의 남편이다. 그러나 그녀는 그의 출현을 눈치채지 못한다. 남자는 큰 손으로 그녀의 목을 조르기 시작한다. 그녀는 처절하게 버둥거리다 차가운 타일 바닥으로 쓰러진다. 남자 배우도 마지막 대사를 읊는다.
“ 이 더러운 년….”
마지막 대사가 샤워기의 물소리에 묻혀 버린다. 마지막 힘을 다해 남편을 쳐다보는 그녀의 두 눈에 이어, 카메라는 그녀의 손으로 옭겨가, 둥근 비누가 그녀의 손에서 미끄러져 나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비누가 클로우즈 업 되면서 숨을 거둔다.
정말 완벽한 연기라는 평을 받았다. 마지막 장면에서 죽어가는 손에서 비누가 빠져나가는 모습을 넣자는 것은 경숙의 아이디어였다. 그 마지막 장면은 관객의 기분을 묘하게 감동시켰고 영화의 결말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경숙은 그 당시의 기억이 되살아나 살며시 미소를 지으며 뿌듯함을 느꼈다. 순간, 뜨거운 물의 수증기로 그녀의 시야가 분명치는 않았으나, 샤워 커튼이 꿈틀하는 것이 보였다. 아니, 그렇게 보였다고 생각되는 것이었다. 경숙은 깜짝 놀랐다. 잘못 본 걸까? 영화에서 처럼 젖혀진 커튼 뒤로 사람의 모습이 나타나지는 않았으나, 경숙은 그것을 확인하고 싶었다. 그녀의 손에 의해 샤워 커튼이 차르륵 소리를 내며 걷혀졌다. ‘아무도 없었다.’
경숙은 안도감에 깊은 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녀는 갑자기 자신이 아주 바보스럽다고 생각했다. 도대체 무엇을 두려워 하는 걸까? 커튼 뒤에 무엇이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일까? 도무지 그녀는 자신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으나, 보통 때의 기분으로 편안하게 목욕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녀는 바보스럽다 생각하면서도, 도망치듯이 욕실을 뛰어 나왔다.
‘ 내가 왜 이러는 걸까? ‘

경숙은 다시 침실로 들어갔다. 그녀는 잠이 최고의 수단이라는 판단을 내렸던 것이다. 그녀는 화장대 앞에 앉아 화장을 대강 지우며 생각했다. 오늘 밤에 느껴지는 이상한 느낌들… 그런 것이 남편과 연관이 있으리라 여겨졌다. 남편이 지금 내 옆에 있었다면 내가 그런 기억과 어처구니없는 두려움으로 나 자신을 바보로 만드는 일이 있었을까? 왜 자신이 혼자 있어야 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자신은 남편에게 충실했으며, 일도 열심히 했다. 그들은 연예계의 성공한 부부였으며, 아주 모범적인 부부의 모델이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남편의 외도로 모든 것이 틀어져 버렸다. 그 가당찮은 어린 계집애. 경숙의 마음 속에 서서히 분노가 치밀고 있었다. 그 여자만 없었더라면, 그들은 아직도 행복한 부부일텐데. 도무지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그녀는 자신에게 물었다. 내가 잘못한 것은 없어. 난 최소한 노력은 하니까. 일이 이렇게 진행되고 있는데도 가정을 지키려고 하는 자신의 모습이 마치, 창 한 자루 없이 싸움에 나서는 외로운 무사같이 생각되었다. 그녀는 가정을 지켜야 한다. 그것은 연예인으로서의 자존심이나 다른 여자에 대한 경쟁심리는 절대 아니었다. 그녀가 정말로 원했던 것은 사랑하는 남자와의 ‘가정’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부모님들의 불행한 가정 생활로 인해 그런 생각을 갖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해 본적이 없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그저 원하는 것일 뿐이다. 그녀는 사랑이 필요했고, 그 사랑이 훌륭한 가정이라는 결실로 맺어지길 원했다. 그 꿈이 꽤 잘 되어 가고 있었는데… 그녀의 꿈이 거의 완성되어져 가고 있었는데, 그 못된 것이 나타난 것이다. 이혼이라니… 남편이 원하는 것이 정말 그것일까… 그녀는 믿을 수 없었다. 남편의 입에서 그런 말이 처음 나왔을 때는 그를 원망하는 마음조차 가질 수 없었다. 너무 놀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삼일의 생각을 거친 후, 이혼 서류를 들고 다시 찾아 온 남편의 얼굴을 다시 보았을 때는 그의 말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았다. 혼란스럽고 울분에 차 있었던 그 당시의 감정이 되살아 나는 것 같았다. 그때는 남편이 내민 이혼 서류에 서명하는 대신 그의 얼굴에 던져 준 것이 고작이었다. 하지만 지금, 화장대 서랍 안에 있을, 그녀의 서명을 기다리는 그 저주스런 서류들을 생각하니, 남편의 얼굴에 칼이라도 던지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침대에 누웠으나 경숙은 도무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몸은 무척 피곤한데도 그녀는 잠을 들 수가 없었다. 남편에 대한 분노 때문일까… 남편을 무작정 기다리기로 결심을 한지 오래인데, 새삼스레 이런 분노라니… 잠을 자려는 그녀의 정신은 생각에 꼬리를 물고 오히려 더욱 맑아졌다. 도무지 잠을 청할 수가 없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피로에 지쳐서 숨쉬는 것조차 힘겨웠는데도 말이다!
거실의 벽시계가 새벽 한 시를 알리고 있었다.

4>>

경숙은 침대 속에서 한참을 뒤척이다가 잠이 오지 않을 때에 사용하던 방법을 생각해 냈다. 그것은 우유를 따뜻하게 데워 마시는 일이었다. 그녀는 몸을 일으켜 주방으로 걸어 갔다. 냉장고에서 우유를 꺼내고 중탕 주전자에 붓고 스토브에 불을 켰다. 그녀는 주전자 속의 우유가 끓어 오르길 기다렸다. 얼마쯤 지났을까. 주전자가 쉬익하고 쇳소리를 냈다. 경숙은 주전자를 불에서 내려 큰 머그에 뜨거운 우유를 가득 채웠다. 설탕을 약간 넣는 것도 잊지 않았다. 우유가 너무 뜨거웠으므로 그녀는 그것을 곧바로 마실 수가 없었다. 그녀는 식탁의 모서리에 앉아 약간 기다리기로 했다. 경숙은 우유를 후하고 불며 식기를 기다렸다. 그녀의 입김에 하얀 액체의 수면이 일렁였다.
우유...
하얗고 평범한 액체가 그녀의 또 다른 기억을 일깨웠다. 평범하지도 않거니와, 슬프고 비극적인 기억이었지만 경숙은 굳이 그 기억을 떨쳐내려 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연스레 그 기억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경숙의 모친은 무지한 여자였다. 무지한 만큼 고집도 세었으며, 생각에 융통성도 없었다. 처녀시절, 거의 팔려오다시피했던 결혼에 있어서 남편에 대한 그녀의 애정은 거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경숙은 그녀의 모친에게 있어서 삶의 가장 큰 기쁨이었으며, 위안이었다. 경숙이 어렸을 때엔 어떻게 그런 결혼이 있을 수 있었는지에 대해 아무런 의문도 없었다. 엄마는 그저 엄마였고 아빠는 그저 아빠였다. 경숙이 태어나면서부터 그들의 딸이었듯이, 그들도 태어나면서부터 그저 부부였을 것이라고 믿었었다. 하지만 경숙이 자라남에 따라 부모님들의 불화를 아예 이해 못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당연한 불행이었으며, 그녀의 부모님은 결코 행복할 수 없었다. 경숙의 모친과는 달리 그녀의 아버지는 과격한 실질주의자였으며, 약삭빠른 실리주의자였다. 둔하고 황소같은 어머니와 영리하고 여우같은 아버지. 아버지는 경숙에게 매우 다정다감한 사람이었으나, 자신의 아내에게 있어선 결코 그러지 못했다. 둘은 서로 맞지 않아 자주 싸우곤 했다.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아버지의 인내심에 드디어 한계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는 더 이상 아내를 견뎌낼 도리가 없었던 것 같다. 엄마의 상대하기 힘든 성격도 그랬거니와, 엄마의 많은 돈이 그의 마음에 '악'을 불어 넣은 것 같았다. 그 즈음의 그는 그 동안 거느려왔던 사업이 최악의 사태를 맞게 되었고, 급기야는 조부모님들의 어마어마한 재산마저 모두 탕진해 날리고 말 정도의 파산을 이룩해 냈던 것이다. 그러한 아버지가 잃어버린 부와 명예와 자존심을 회복하고 재기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는 데엔 오로지 돈이 필요했다. 사업자본을 원했던 것이다. 아내의 돈이 탐났으나, 그녀 또한 자신의 재산에 대해서는 완강했다. 그 당시 어머니의 모습으로는 단지 돈이 아까와서가 아닌, 남편의 파멸을 기어코 보고야 말겠다는, 약간 가학적인 고집이 작용했던 것 같다. 그런 충돌로 인해, 영리하고 약삭빠른 만큼 야망도 컸던 아버지는 어느 날부터인가 자신의 아내를 죽이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혀 왔던 것 같다.
경숙의 어머니는 매일 밤 취침 전에 언제나 뜨거운 우유에 소금을 약간 넣어 마시는 버릇이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밤에, 경숙은 아버지가 어머니의 우유를 준비하는 것울 몰래 보게 되었다. 우유를 덥히고 소금을 넣는 일은 항상 어머니 자신이 했던 일인데, 그날따라 친절을 베푸는 아버지의 행동이 몹시도 부자연스럽게 보였던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는 우유에 무언가를 넣는 것도 보게 되었다. 그것은 집에서 먹는 설탕도, 소금도 아닌, 눈가루같이 솔솔 뿌려지는 것이 마치 도너츠에 뿌리는 파우더 슈거같은 것이었다.
그당시 열 다섯의 소녀였던 경숙은 아무것도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다. 하지만 우유를 마시던 엄마가 울컥 피를 토해내며 발작하는 모습을 본 후론 아버지의 모든 행동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귀찮고 밉살스런 아내를 죽이고 그 후에 아내의 돈을 취하고 싶어한 아버지, 그런데 아버지가 할머니처럼 살인자라는 것을 깨닫고 나서도 경숙은 그가 전혀 두렵지 않았다. 그녀를 낳아준 아버지였기 때문일까? 그 일이 있은 후, 경숙은 아버지를 더욱 좋아하게 되었다. 반면, 그녀의 어머니에 대해서는... 단지 측은하다는 생각만 들 뿐이었다. 그리고는 매우 큰 상실감과 슬픔에 빠져 생활하게 되었다.
경숙의 아버지는 그 일이 있은 후 절대 겁을 먹지도 전혀 동요되지도 않는 모습이었다. 그는 아마도 절대 안전하리라는 바보같은 믿음을 가졌던 것이 아닐까? 그의 태연한 모습은 경숙에게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점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은 완전 범죄와는 거리가 무척 멀었는데도 말이다. 어쩌면 그는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며 망연자실한 죄책감에 자포자기하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그 증거로 그는 그 행동의 본래 의도였던 아내의 돈에는 손가락 하나 대지 않았다. 어머니를 살해하고 난 뒤에 보여준 그의 행동들은, 그가 아내를 얼마나 사랑하고 있었는지, 그리고 악마적인 돈에 대한 집착을 얼마나 저주하고 있었는지 증명해 주고 있었다.
경숙의 우려대로 경찰들은 절대 봉사가 아니었다. 경숙의 아버지는 한 달 여 만에 아내 독살범으로 체포되었다. 그때 아버지는 울고 있었다. 그 눈물은 경숙이 목격한 유일한 '남자의 눈물'이었다. 그 당시에 그는 무엇을 슬퍼하고 있었을까? 아내를 죽이고 가정을 파탄시킨 행위에 대한 '도덕적인' 눈물이었을까, 아니면 삶의 마지막에 다다른 사람마다 보이는 그런 '이기적인' 후회였을까?

우유가 알맞게 식었다고 경숙은 생각했다. 그러나 더 이상 그 ‘우유’를 마시고 싶은 욕구는 없었다. 우유로부터 무서운 기억을 생각해낸 이유로 그것을 마실 마음이 사라진 것이었다. 경숙은 잠시 망설이다가, 결심한 듯, 우유를 버리기 위해 싱크대 앞으로 다가갔다.
‘하지만, 왜? ‘
그녀는 자신에게 반문했다.

5>>

왜 우유를 마시지 못하는 거지? 그녀는 우유를 무척 좋아하는 데도 말이다. 그에 대한 답은 쉽게 구할 수 있었다. 그건 모두 오늘 밤의 분위기 탓이다. 비오는 음울한 날씨와 ‘거울’과 ‘우유’에 대한 나쁜 기억, 그리고 욕실에서 느꼈던 이상한 공포감등이 오늘 밤 분위기의 중요 원인들이라 생각했다. 또한 그녀는 한 가지 사실을 더 깨달은 것이 있었다. 그것은 그녀가 어렸을 때부터 가지고 있었던 가족에 대한 콤플렉스가 자신을 더욱 그러한 기분으로 이끌고 있었다는 것이다.

경숙은 어렸을 시절부터 자신에 대해 그리 좋지 않은 평가를 내리고 있었다. ‘살인자의 손녀’, ‘살인자의 딸’이라는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할머니도 살인자였고, 그녀의 아들인 경숙의 부친마저도 사람을 죽였다. 그런 ‘나쁜 피’는 대대로 대물림된다는 사실을 믿고 있는 그녀로서는, 자신도 언젠가는 손에 피를 묻히고야 말것이라는 불안 속에서 살아왔던 것이다.
하지만 경숙은 그런 생각을 가지고 죽는 날까지 살고 싶지는 않았다. 그녀에겐 그녀만의 삶이 있을 것이 틀림 없으며, 할머니나 아버지가 어떻게 살다 가셨든, 그건 자신과의 인생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경숙은 머그를 높이 처들었다. 그녀는 오늘 밤의 이런 분위기, 이런 기분등을 모두 이겨내고 싶었다. 동시에 그녀의 과거 기억들과 연루된 콤플렉스 – 그녀를 자신없게 하고 불안에 떨게 만들었던 좋지 않은 생각들을 극복하고 싶다는 욕구를 강하게 느꼈던 것이다. 드디어 그녀는 팔을 내리고 머그를 입에 갖다 대였다. 그녀는 망설이지 않고 비릿한 음료를 단숨에 들이켰다. 그녀의 얼굴에 야릇한 승리감에 도취된 만족이 미소가 훑고 지나갔다.
그 때, 집 밖에서 자동차의 타이어와 콘크리트의 마찰음이 들렸다. 이런 밤중에 올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을 경숙은 잘 알고 있던터라, 누구인지 몹시 궁금했다. 혹시 남편이 아닐까? 그녀는 급히 거실로 나갔다. 누군가 벨을 울렸다.
거실의 모니터에 얼굴을 비춘 방문객은 남편이 아닌 ‘그 여자’였다. 경숙은 깜짝 놀랐다. 저 여자가 이 시각에 왠일일까? 경숙은 때때로 죄를 지은 사람들이 더욱 용감해질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저 여자도 그런 걸까? 모니터를 통해 보이는 그 여자의 모습은 비에 젖은, 게다가 굶주린 싸움닭같았다. 이런 식의 방문이라니… 저 여자가 자신의 행동을 이해하고 있기나 한 것일까하는 생각이 들어, 경숙의 입가에 쓴 웃음이 지나갔다. 잠시 망설이다가 경숙은 문을 열어 주었다.

어느 새 경숙과 그 여자는 두 잔의 찻잔이 놓여진 테이블을 가운데에 두고 서로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 남편은… 잘 있나요? “
태연스럽게 남편의 안부를 묻는 경숙의 말에 그 여자는 약간 놀란 눈치다. 경숙도 자신이 이렇게 침착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해 이상하단 생각이 들었다. 무슨 이유에선지.. 경숙은 모든 일이 귀찮기만 했다. 그녀는 이 반갑지 않은 손님이 어서 빨리 나가 주기를 바랐다.
그 여자는 당돌하게도 경숙에게 충고하고 있었다. 사랑에 대해서. 그리고 이미 깨어진 관계에 대해서. 경숙에게 그런 말들은 전혀 뜻밖의 것이 아니었다. 어느 정도 그녀가 예상했던 말들이었다. 경숙은 특별히 할 말이 없었으므로 그저 듣기만 했다. 자신이 이혼에 동의를 하지 않으리라는 것은 너무도 명백한 사실이었다.
“ 당신은 감독님을 옭아 매고 있어요. 그걸 모르세요? 당신이 아닌 저란 말이이에요. 이미 마음이 떠난 사람이이에요. 더 이상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구요. 이름뿐인 부부관계가 무슨 소용이 있어요? 차라리 저희를 간통죄로 고발하지 그러세요.” 다분히 명령조로 그 여자가 말했다.
“ 당신이 모르는 것이 있어요. “ 경숙이 차분한 음성으로 말했다.
“ 그이의 감정은 상관없어요. ‘내가’ 아직도 그 사람을 사랑해요. 나만 좋으면 그뿐이죠.”
그 여자는 불쾌하다는 투로 계속 지껄이고 있었다. 그 중엔 경숙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말들도 많았지만, 경숙은 상심한 마음을 털어 놓지 않았다. 모든 일이 어서 빨리 끝나기만을 바라고 있었다. 사실 그녀는 그 여자의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다른 생각 때문에 머리가 터질 지경이었다.
‘ 나쁜 피… 살인의 유전…’
저 여자만 없어진다면 남편은 다시 자신에게로 돌아 올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저 여자는 너무 젊어서 늙어 죽을 때까지 기다릴 수 없을 것같았다. 아니, 그런 일은 경숙 자신이 직접 해 낼 수도 있을 것만 같았다. 그녀는 아까의 그 결의, 가족들 중 두 사람이나 살인을 저질렀다는 콤플렉스를 이기겠다는 결의와는 달리, 오히려 그것을 인정하고 당연히 자신도 그래야 한다는 의무감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오늘 밤 그녀가 집안에 들어 설 때부터 그녀를 엄습했던 ‘惡의 분위기’ 속으로 그녀는 점점 빠져 들어가고 있었다.
경숙의 손이 약간 경련을 일으켰다. 언젠가 보았던 ‘우물 앞의 손’같이…

그 여자는 쉴 새 없이 떠들어 대고 있었다. 경숙은 태연한 척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거닐듯이 그 여자의 뒷 쪽으로 걸어갔다. 그녀의 하얀 목덜미가 보였다. 그 여자는 뒤도 돌아 보지 않은 채, 자신의 얘기에 몰두해 있었다.
‘ 나쁜 년… ‘

경숙은 침실복의 허리띠를 끌러 양손에 꼭 거머 쥐었다. 잘 해낼 수 있을까?

경숙의 호흡이 거칠어 졌다. 그녀는 속으로 숫자를 세며 깊은 숨을 들이 마셨다.

하나, 둘, 셋…

6>>

모든 일이 너무나도 쉽게 끝났다. 단지 몇 분만이 걸렸을 뿐이다. 그 여자는 목에 감긴 허리띠를 풀려고 안간힘을 쓰다가 머리를 카펫트에 처박고 축 늘어져 버렸다. 죽은 여자가 얼굴을 보이지 않은 것은 아주 다행이었다. 죽은 사람의 얼굴, 특히 자신이 죽인 사람의 얼굴을 보는 것이 그다지 즐거운 일은 아니라는 것을 경숙은 어느 정도 상상할 수 있었다.
경숙은 당황해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태연한 모습으로 눈앞의 싸늘한 몸뚱이를 바라 보았다.
‘ 할머니도 그랬고, 아버지도 그랬어… 결국엔 나도… ‘
순간 그녀는 이성을 되찾았다. 새로운 공포가 그녀를 공격했다. 분위기와 어리석은 선입관에 정복당한 자신의 어리석음을 절실히 깨달았던 것이다.
경숙은 온 몸의 힘이 빠져 나가는 듯이 그 자리이 풀썩 주저 앉았다. 뜻밖에도 그녀는 눈물을 흘렸다. 귀찮은 존재를 없앴다는 석연찮은 승리감도 만족감도 없었다. 그녀가 흘리는 눈물은 진정한 공포와 두려움에서 오는 것이었다. 그녀의 눈 앞에 있는 것은 진짜 시체이다. 그것도, 다른 사람이 아닌, 경숙 ‘자신의 손’으로 죽인 시체. 하녀의 주검도, 어머니의 주검도 그녀를 이렇게 무섭게 하진 않았다.
‘어떻게야 하지?? 그 다음엔…’
경숙의 머릿 속엔 이젠 남편도 그 나쁜 여자도 없었다. 오직 자신 뿐이었다. 일이 이렇게 되리라는 것은 그 누구도 상상치 못했으리라. 하지만 일은 기어이 일어나고 말았다. 전혀 예상치 않은 일이. 그러나 경숙은 더 이상 자신의 행위에 대해 변명하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 다음엔… 어떻게 해야 할까? 이 시체를 어떻게 해야 할까? 일단은 이 시체를 어딘가에 치워야 할텐데… 그녀는 여러 가지 생각에 빠졌다.
온통 정신이 빠져 있는 경숙은 또 한 대의 자동차가 집 앞에 멈춰 서는 것을 알아 채지 못했다. 자동차의 문이 열리며 한 남자가 내렸다. 그의 발자국 소리가 가까워 지는 것을 듣고서, 경숙은 또 한 명의 방문객이 있다는 것을 알아 차렸다.
누굴까?
시체를 치울 겨를도 없이 경숙은 누군가의 방문을 받아 들여야 했다. 잠기지도 않은 현관문이 벌컥 열리며, 어떤 남자가 들어섰다. 남편이었다.
“ 여보. “ 경숙이 외쳤다.
남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거실로 들어 와서는 경숙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는 테이블 옆에 웅크린 채 엎어져 있는 물체를 경악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무릎을 꿇고 죽은 여자의 옆에 앉았다. 목에 휘감긴 허리띠를 떨리는 손으로 만져보더니, 경숙을 바라보았다.
“ 여보.” 경숙이 어깨를 움츠리며 흐느끼는 목소리를 냈다. 혹시, 남편은 자신이 벌써부터 이런 일을 계획하고 있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자 온 몸에 소름이 돋기 시작했디.
“ 어쩌다 이런 일이…. 사고였소? “
경숙의 눈에서 눈물이 울컥 쏟아졌다. 그녀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 내 잘못이오. 여보, 전부 내 탓이오.”
남편의 목소리엔 진실어린 죄책감이 묻어 나왔다. 하지만, 경숙은 모든 것이 자신의 잘못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남편이 외도를 했건, 그들 부부가 별거를 했건, 그런 것들은 살인하고은 아무런 관계가 없다. 어느 정도 원인은 되었겠지만, 결국에 손에 피를 묻힌 것은 바로 경숙이다. 남편이라도 자신을 이해해 주었으면하고 경숙은 바랐다.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 내렸다.
“ 여보, 결국 내 잘못이오. 미안해, 여보. 내가 더 신중했어야 했소…”
남편이 중얼거리며, 테이블 위의 전화기에 손을 뻗었다.
경숙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그의 팔에 매달렸다.
“ 여보… 무슨 일을 하려고요? 여보.. 제발.. “
“ 경찰도 이해할꺼요. 이해는 못하더라도 정당한 재판은 받을 수 있겠지. 그들도 내 잘못이 더 많았다는 데에 동의할 것이고, 당신의 죄는…”
“ 안돼요, 여보. 제발, 제발… 여보, 경찰은 안돼요.”
“ 어쩔 셈이요, 그럼? 당신, 정신 좀 차려.” 남편이 소리쳤다.
“ 어쨌든, 경찰은 안돼요, 여보, 제발…” 경숙이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경숙이 말했다.
“ 저… 저 여자를 아무도 몰래 치우는 것이 좋겠어요.”
“ 당신, 미쳤소?” 남편이 경악하듯이 소리쳤다.
“ 아뇨, 아니에요. 전 멀쩡해요. 하지만… 하지만, 경찰은 싫어요. 그렇게 되면 저희는 끝장이에요. 배우로서의 제 삶도, 또한 감독으로서의 당신 삶도 모두 말이에요. 그렇게 되고 싶으세요? 여보, 제발, 절 위해 한 번만 도와줘요.” 경숙이 호소하듯이 말했다. 하지만 남편의 태도는 완강했다.
“ 난 그런 모험하기 싫소. “
“ 여보, 제발. 제발 절 도와 주세요.” 경숙이 되는대로 지껄여 댔다.
“ 저 여자를 묻거나 불에 태울 수도 있어요. 이 주위엔 공터가 많으니까. 우리… 이웃도 없잖아요. 여보, 사랑해요…. 당신은 제 남편이잖아요. 제발 절 도와 주세요.”

경숙은 남편의 냉랭한 태도에 참을 수 없는 분노와 슬픔을 느꼈다. 고지식한 남자. 경숙은 그 와중에서도 지난 몇 년을 부부로서 함께 살아 온 그의 모습을 생각했다.
도무지 위험이란 것을 모르고 언제나 안전하고 확실한 것만을 찾았다. 그런 성격이 그들 부부 사이에 적지않은 문제를 만들곤 했었다. 아무리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의 위험이라도 그 파편이 자신에게 튈까봐 몸을 지나치게 사렸었다. 아니, 경숙은 뒤늦게야 깨달았다. 경숙 자신은 남편에게 있어, 더 이상,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는 죽은 여자가 했던 말이 아직도 그녀를 아프게 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 당신이 아닌 저란 말이에요. 당신 남편은 더 이상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요.’
그 말은 사실이기도 했다. 더 이상 자신은 사랑받는 아내가 이님을 잘 알면서도 왜 그토록 고집을 부렸던 걸까? 그건 자존심이나 세상의 이목을 따지는 차원 이상이었다. 그 이유는 경숙이 남편은 너무나도 사랑하기 때문이었다. 경숙은 눈을 지긋이 감고 생각했다. 어떨까, 이혼하는 것이?
이혼이라는 말이 경숙에게 새롭게 다가왔다. 하지만 그 딴 것이 뭐 문제가 될까? 사랑하는 남편에게 구속이 아닌, 진정한 자유를 주자. 그리고 그녀 자신도 이혼을 미끼로 이 상황을 벗어 날 수 있을 것이다. 이젠 이혼은 그녀에게 아픈 희생이 아니었다. 매우 중요한 흥정인 셈이다. 더 늦기 전에… 경숙은 눈을 뜨고 여전히 전화기를 노려 보고 있는 남편을 바라 보았다. 그녀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 절 도와 주시는 거죠, 여보? 당신의 자유를 위해서, 전… 이혼을 얘기하는 거에요.”
남편이 경숙에게 고개를 홱 돌렸다. 놀란 것이 틀림없었다. 저 여자… 미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경숙의 눈엔 지금 그 어떤 것도 믿을 수 없었다. 그녀는 이젠 당황하거나 무서워하지 않았다. 슬퍼하지도 않았다. 오직 이 상황을, 자신이 살인자라는 상황을 한시바삐, 그리고 안전한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 벗어날 수 있기를 바랄 뿐이었다. 하지만, 이혼이라는 미끼가 남편에게 아무 효력도 없다면? 저 여자가 죽어 버린 이상 남편은 더 이상 경숙과의 이혼에 관심이 없을지도 모른다. 경숙은 용기내어 입을 열었다.
“ 이런 일에 당신도… 책임이 어느 정도 있다는 것을… 아까 인정했잖아요. 그동안 당신이 원한 것이 그것 아니었나요? 제가 왜 이런 실수를 저질렀는지 저도 잘 모르겠어요. 아마도… 전 그때 제정신이 아니었었나봐요. 결코 위험하지는 않을 꺼에요. 이 주위는 인적이 드문데다 저 여자는 별로 유명한  여자도 아니니까, 무명 여배우의 실종따윈, 스캔들에 의한 사랑의 도피 행각처럼 보도될 꺼에요. 여보… 제발, 도와줘요. 중요한 것은 당신이 빨리 제 곁을 떠나고 싶어한다는 거잖아요.”
남편의 눈이 반짝하고 빛나는 것을 경숙은 보았다. 동요되고 있음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그의 입이 씰룩거렸다. 하지만 아무 말도 나오지는 않았다.
경숙은 재빨리 일어나서 침실로 들어 갔다. 서류 작성에 필요한 것은 모두 그곳에 있었다. 이렇게 쉬운 일이라니… 한 부부가 서로 남이 되는 것이 이렇게 쉽고 간단한 일이라니, 경숙은 약간 놀랐으나, 자신이 그런 감상적인 기분을 즐기고 있을만한 여유가 없다는 것을 생각하고는 서둘러 그 일을 마쳤다.
잠시 후, 침실에서 나오는 경숙의 손에는 두툼한 서류 뭉치가 들려져 있었다. 그녀는 남편에게 그 서류를 건넨 후, 남편의 눈치를 살폈다.
‘ 이 여자가 미치지 않고서는… ‘ 남편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경숙은 조바심을 내며 남편의 표정을 살폈다. 하지만, 서류를 건네 받은 후의 남편은 입맛을 다시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리고 뒤이어 들려오는 안도의 숨소리.
경숙은 남편의 뜻밖의 태도에 깜짝 놀랐다. 그녀는 남편의 얼굴을 쳐다 보았다. 그의 시선은 그녀에게 있지 않았다. 그녀는 그의 시선을 따라 어깨 너머로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경숙의 입과 두 눈이 동시에 커졌다. 그녀는 너무나 놀라 비명조차 나오질 않았다. 죽어 뒹굴던 여자가 긴 잠에서 깨어난 듯이 기지개를 켜며, 고양이 같은 하품을 하고 있었다.
“ 이젠 가지.”
남편이 죽어 있던 여자를 향해 말했다. 그 여자는 몸을 일으키며 경숙에게 말했다.
“ 당신의 팔 힘은 무척 세더군요. 만약 목에 감겨진 부분의 끈을 내가 양손으로 잡고 있지만 않았다면 틀림없이 당신이 원하는 대로 되었을 텐데. “
그 여자는 즐거운 듯이 웃음을 지으며 현관을 나서다가 다시 한번 고개를 돌리고는 경숙에게 말했다.
“ 무명 여배우의 스캔들이라고요? 당신은 어리석은 바보에요. 어쨌든, 이혼 고마워요.”
경숙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멍하니 현관을 쳐다 보는 경숙의 귀에 멀어져 가는 자동차의 엔진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머릿속이 텅 비어 버린 느낌이었다. 그녀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온통 혼란 스럽기만 했다.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