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에서 최초로 시도되는 '탐정 추리극'이라는 카피를 보고 추리소설과 영화의 골수 애호가로서 전율을 느꼈다. 드디어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영화가 나오는구나. 남들이 비주류라고 다 무시하는 추리 마니아지만 꿋꿋이 활동하다 보니 이런 날도 온다. 살아 있길 잘했어 ㅠ.ㅠ 작년에 <공중곡예사>라는 이름으로 촬영이 진행되고 있다는 건 알았지만 개봉 직전에 <그림자 살인>으로 바뀌었더라. 개인적으로는 바뀐 제목이 좀 평범하긴 해도 추리극이라는 느낌을 확 주기에 괜찮다고 봤다. 아무튼 큰 기대를 하고 친구와 함께 캐러멜 팝콘 大자를 사서 우걱우걱 씹으며 관람을 마쳤다. 다 보고 난 소감은 역시 팝콘은 달달한 캐러멜 팝콘이 맛있구나 하는 정도.
명색이 추리극이라는데 어디서 어떤 추리를 해야 하는지 도통 알 수 없었다. 배경은 1900년대 초반 경성. 도입부까지는 나쁘지 않았다. 얼른 돈 벌어서 성공하고 싶은 마음밖에 없는 황정민 탐정이 의대생 류덕환이 물어온 살인사건을 함께 해결하는 추리물의 정석적인 설정을 보여주고 있어 제법 흥미진진했지만, 끝까지 보고 나서는 단단히 머리 쓸 각오를 하고 간 추리물 마니아가 보기엔 함량미달이라는 평가를 내릴 수밖에 없어 유감이다. 일단, 나름대로 독자를 깜짝 놀라게 만들겠다는 일념 하에 제작진이 야심차게 준비했을 범인의 정체가 지나치게 시대착오적이다. 1920년대에 이미 반 다인, 로널드 녹스 같은 명추리소설가들이 사용하지 말아야 할 '식상한 수법'으로 규정한 그저 그런 트릭을 내놓다니...
그나마 그 뻔한(실은 너무나 뻔해 설마 저거겠어? 했는데 그거였다-_-;; 어쩌면 이런 식의 뻔한 트릭을 2009년에 사용할 리 없다는 관객의 선입견을 이용한 작가와 감독의 의도?) 범인의 정체도 탐정의 논리적 추리로 이뤄진 게 아니라 범인s가 그냥 화면에 띡 등장해 주저리주저리 설명을 읊는다. 으윽, 이러면 관객이 머리를 굴릴 필요가 없잖아. 대놓고 다 보여주는데 말야. 여기서 나는 흐트러져 가는 정신을 가다듬었다. 그래, 추리극에는 꼭 'Whodunit(누가 죽였을까?)'만 있는 건 아니잖아. 'whydunit(왜 죽였을까?)'을 파고들면서도 충분히 긴장감을 유지할 수 있어. 사실 연쇄살인의 범인은 초반에 (지들이 알아서) 나오지만, 그 살인의 목적은 중반 이후까지 밝혀지지 않는다. 하지만 거기서도 결국 황정민 탐정이 하는 일은 없었다. 조력자로 나오는 엄지원 발명가가 어디서 소문을 듣고와서 친절하게 A부터 Z까지 쫙 자초지종을 늘어놓더라. 황정민 탐정이 내 곁에 있으면 이 더러운 수코양이 같으니라고, 니가 한 게 뭐가 있어, 니가 탐정이야! 하면서 신발을 벗어 싸대기를 후려쳤을지도 모르겠다.
우리나라는 왜 추리극이 안 될까? 내 생각은 이렇다. 이 영화랑 비슷한 시기에 개봉한 일본 추리영화 <용의자 X의 헌신>을 보자. 난 영화는 못 봤지만 히가시노 게이고의 동명소설은 몇 년전에 읽었다. 아마 이 소설을 100퍼센트 그대로만 옮겼어도 꽤 그럴싸한 추리영화가 나왔을 거다. 원작에서 사용된 트릭이 비교적 뛰어나니, 그걸 토대로 만든 영화도 당연히 아귀가 딱 맞는 좋은 트릭을 선보였겠지. 요점은 좋은 원작의 부재에 있다. 추리소설 출간이 100년 넘는 전통을 자랑하는 영국, 미국, 일본의 경우 영화, 드라마, 라디오 드라마 등으로 각색할 만한 훌륭한 작품이 물경 수백 편이 넘는다. 더구나 추리소설을 우리나라처럼 변방의 싸구려 문학으로 취급하지도 않는다. 레이먼드 챈들러, 마쓰모토 세이초 같은 추리소설가들이 자국을 대표하는 문인으로 거론될 정도니까. 내 추측에 불과하지만 아마 감독이나 작가가 동서고금의 명 추리소설, 영화를 치밀하게 연구하고 크랭크인에 들어갈 리가 없었으리라. 적어도 수십 억 자본이 투자되는 영화라면 최소 이 장르의 걸작 100편 이상은 보고 연구를 했어야 하지 않을까?
추리물에 있어 축적되어 있는 장르의 역사도 미약하고, 저변도 변변찮은 한국에서 좋은 추리극을 만들기 위해서는 다른 나라보다 몇 배는 더 노력했어야 했다. 그렇지 못했기에 이런 안이한 결과물을 내놓은 데 그친 것은 아닐런지. 더구나 이 영화의 치명적인 패착 중 하나는 관객을 너무 쉽게 봤다는 데 있다. 이 장르를 기획하는 분들은 잘 알아둬야 할 게 한 가지 있다. 서양이나 일본의 경우 미스터리/스릴러 작가 중 수억 부를 가뿐히 뛰어넘는 베스트셀러 제조기가 있을 정도로 이쪽 장르가 활황이며, 미국에서 인기 있는 TV드라마는 살펴보니 대부분 법의학 스릴러더라. 대부분의 국민들이 미스터리/스릴러를 매일 접하고 있고, 그게 재미있는 오락거리로 확고히 자리매김한 나라들이다 보니 이 장르에 대한 거부감 자체가 없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추리물의 사정은 아직까지는 마니아 취향에 가깝다. 대부분의 추리소설, 스릴러가 2천 부도 팔지 못한다. 그러나 그 마니아들은 각국에서 가려뽑은 양질의 미스터리/스릴러만 골라 섭취하다 보니 눈이 대단히 높고, 취향도 다분히 고급스럽다. 예를 들어 미국에서 수천만 부를 넘게 파는 킬링타임용 스릴러의 대가 제임스 패터슨 같은 경우 한국에서는 나오는 족족 패퇴한다. 다시 말해 우리나라의 추리물 마니아들은 기본적인 수 자체가 적은데, 그들이 대부분의 추리물을 소화하다 보니 한정된 돈으로 가벼운 오락용 추리물보다는 같은 값이면 고품질의 추리물을 소비한다는 얘기다.
추리물을 만들 때, 절대로 눈높이를 다운 그레이드 하지 마라. 너무 수준이 높으면 대부분의 '일반적인' 관객들에게 버림받을 거라고 걱정할 필요는 없다. 진실을 말하자면 '일반적인' 관객들은 추리물 자체에 관심이 없다. 차라리 수십 번 다듬고 고쳐 치밀하게 잘 짜여진 트릭과 반전으로 이 장르에 닳고 닳은 마니아들과 정면승부하기 바란다. 이들, 잘 조련된 마니아들의 입소문에 의해 일반 관객들에게 자연스레 좋은 입소문이 퍼질 것이다. 아무리 추리물의 인기가 그저 그런 우리나라에서도 <살인의 추억> <올드 보이> <추적자> <세븐 데이즈(이 영화는 보지 못했다)> 등의 잘 만들어진 추리물은 실패한 사례가 없다. 만약 <그림자 살인>의 제작진이 단서나 범인의 정체, 추리 등이 너무 어려우면, 관객들이 지레 포기할 거라고 생각했다면 그건 철저한 오산이다. 팽팽한 두뇌싸움을 하러 간 사람들에게 그걸 주지 않으면, 갈증만 더해갈 뿐이다. 필연적으로 실망할 수밖에 없다.
셜록 홈스보다는 강철중에 가까운 황정민 탐정의 캐릭터나 최소한의 완성도는 갖추고 있다는 점, 무엇보다 항일 오락영화라는 점에서 아주 실패할 거라고 보지는 않았지만 최초로 시도되는 탐정 추리극이라는 점에서 결과적으로 무척 실망했다. 영화가 잘 되서 속편이 나온다면 더 업그레이드 된 작품을 기대해보겠다. 그렇지 않고서는 함부로 '추리'라는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마라.
별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