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최고 추리소설 중 하나라는 [문신 살인사건]. 아주 옛날 민망한(!) 표지로 읽었었는데, 몇년 전 검은숲에서
개정판이 나와서 다시 읽었다. 1948년에 초안이 나온 작가의 데뷔작인데, 몇년 전 같은 작가의 [인형은 왜 살해
되는가]도 아주 재밌게 읽은 적이 있었다. [인형]은 바로 제목에 트릭의 답이 있었다. 내 생각에 이 작가는 트릭,
오로지 트릭에 심혈을 기울여서 독자들을 만족시키는 정통 추리작가로 보인다. [문신 살인사건]의 핵심은
다중의 밀실트릭이다. 일본의 전통가옥은 천장도 통하고 바닦도 뚫려있어서 밀실은 불가능하다,,, 고들 하는데,
밀실이 가능한 유일한 장소를 선택해서 범인이 감쪽같이 사라지는 기계적인 밀실, 그리고 이러한 기계적인
밀실을 더욱 강화하는 심리적인 밀실트릭을 보여준다.
이 작품의 미덕은 트릭 외에 여러 가지가 있다. 첫째, 전쟁 직후 1946년의 도쿄의 뒷골목을 배경으로, 당시 일본
에서도 천대받았던 문신이라는 하류문화를 소재로, 전반적으로 끈적끈적한 분위기로 전개된다. 이런 분위기
너무 좋다 ㅎ. 온몸을 문신으로 덮은 여인의 나신, 러브씬, 불륜 등의 19금 씬들이 자주 나와서 비쥬얼하게 상상의
나래를 필 수 있는 맛도 있다. 둘째, 가독성이 정말 뛰어나다. 문신과 관련한 일본의 전통문화 얘기도 나오긴
하는데 지루할 정도는 전혀 아니고 군살 없이 속도감 있게 진행된다. 특히 작가가 제3자의 관점에서 무성영화의
변사처럼 사건의 전개과정을 곳곳에서 정리해줌으로써 독자 입장에서는 길을 잃고 헤맬 우려가 전혀 없이 전념할
수 있다. 세번째로, 가장 좋은 점은, 물론 여러 개정판을 거치면서 덧붙였겠지만, 뒷부분에 작품을 이해할 수 있는
평론가와 작가의 글이 풍부하게 담겨있다. 특히 작가가 본인의 입으로 이 작품을 떠올리게 된 계기부터 시작해서,
초안 발간과정, 개정 과정, 트릭의 아이디어 등을 상세히 서술하고 있다. 마친 비틀즈의 명곡 Strawberry Fields
Forever의 초기부터 완성까지 진화과정을 담은 수십 개의 버젼이 공개되어 팬들을 더욱 열광시키는 것과 같은
효과를 내고 있다.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미국 반다인에게서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점이 곳곳에 나온다. [그린
살인사건]처럼 사건을 요약하고 [카나리아 살인사건]의 포커씬처럼 혐의자들과 장기를 두면서 범인을 특정한다.
일본을 넘어서 정통 추리 팬들에게는 정말 보석같은 작품이다. 그리고 처음 읽었을 땐 번역이 뭔가 여기저기
내용이 비어 있고 어색한 느낌이 있었는데 새로 나온 책은 번역이 아주 깔끔하다. 강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