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을 구해 봤습니다. 상당히 좋습니다.
어려운 이야기를 쉽게 하는 것도 뛰어난 재주죠.
게다가 그 독특한 스타일만으로도 반 이상 먹고 들어가고 있으므로...
옴니버스 애니매트릭스는 영화의 배경을 설명하고 곁 가지 사이드 스토리를 풀어내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봐도 그만 안봐도 그만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죠.
일단 기둥 줄거리와 설정을 가만히 뜯어보자면, 카렐 차페크의 R.U.R.에서 시작해서 윌리엄 깁슨에 이르기까지, 지나치게 널리 알려져 있는 통속적인 이야기 - 그런 정도입니다. 어딘선가 본 적 있는 화면, 어디선가 들어 본 적 있는 이야기, 왠지 익숙한 아이디어... 게다가 애니메이션 시리즈는 아무래도 본편에 곁 가지로 덧붙은 잡담에 가깝기 때문에, 이런 경향이 더욱 심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이런 패스티쉬 잡동사니들을 이용하여 엄청난 흡인력과 신선함을 가져다 주고 있다는 게 경이적입니다. 매트릭스 시리즈의 가치는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라고 생각되기도 하구요. 애니매트릭스 역시 보는 이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아주 재미있고, 만족스럽습니다.
물론 패스티쉬 천지라고 하더라도, 테마 자체는 본래 그리 녹녹한 게 아닙니다. 장르 SF 계에 끊임없이 소재를 공급해 온 주요 명제이기도 하죠. 인간과 기계와의 관계, 인간의 삶에 대한 새로운 정의, 인식의 변환 - 확실히 이 작품은 SF가 단순히 Science Fiction의 영역에 머무르지 않고 Speculative Fiction으로 불리우는 이유를 깨닫게 합니다. 이러한 배경을 바탕으로, 멸망한 포스트홀로코스트의 세계를 구원하는 메시아의 영웅담이 펼쳐지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이야기가 더 세련되고 심오하게 느껴지는 게 아닐까 합니다. (장르에 익숙하지 않은 한국에서는, 매트릭스가 늘어 놓는 패스티쉬 자체가 신기하게 여겨지고 있기도 하죠...-_-)
매트릭스같은 작품을 보면, 장르를 사회가 얼마나 잘 이해하고 있는가 그리고 장르적 코드를 얼마나 많이 공유하고 있는가에 따라 작품의 질이 크게 달라진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어떤 천재적인 감독의 재능과 아이디어도 중요하겠지만, 그보다 사회 전체의 문화적인 성숙도가 더 중요하다는 얘깁니다.
쫄딱 망한 우리 영화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의 경우, 기본 테마는 매트릭스 시리즈와 그리 다른 것이 아니었음에도 영화를 만드는 감독부터가 그 주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본질은 잘 모르면서, 겉껍데기가 멋있어 보인다고 그것만 흉내내려다가 실패한 전형적인 예라고 할 수 있죠. 해당 장르에 대한 이해도가 백지에 가까웠기 때문에, 관객은 고사하고 감독 자신부터가 낮선 대지의 이방인이 되어 헤매고 다닐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 와중에 관객을 몰입시키는 설득력은 기대하기 어려운 일이고... 결국 문제는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해당 장르에 대한 마인드가 있으냐 없느냐에 달려 있었던 셈입니다.
애니매트릭스를 보고 나니, 매트릭스 속편이 더욱 기대됩니다.
조만간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겠죠.
사족으로...
카우보이 비밥을 만든 와타나베 신이치로 감독, 애니 매트릭스에서도 역시 탐정 이야기를 택했습니다. 에피소드의 결말도 여운이 남는 서글픔... 카우보이 비밥에서의 그 느낌 그대로더군요.
